정치야사-임광순











정치야사-임광순

인촌과 고하의 우정은 가히 관포지교(管鮑之交)에 이를만
했다.
고하 양자는 송영수(宋英洙)이고 손자는 서울법대 학장을 역임한 송상현교수이다.
송영수가 창동에 따로 살 때 고하와 인촌은 그의 집에 자주들렸다.
당시는 16왓트짜리 전구를 켜고 살던 시절이었다.
겸상으로 밥을 먹다가 인촌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이봐, 진우, 자네 어딧는가?
"나 여깃네"
"자네 지금 어디로 먹는가?"
"코로 들어 가는지 귀로 들어 가는지 나도 모르것네"
그러고는 함께 웃었다.
두 사람은 가끔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고 다투기도 했지만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머리를 마주 대고 웃고 상의를 했다.
일제 말엽 어느 날, 그 날도 송영수의 집에서 밤 늦게까지 무엇인가를 의논하던 인촌과 고하가 큰 소리로 싸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인촌이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송영수는 혼자 씩씩거리며 앉아있는 아버지에게 물어봤다.
"인촌 선생님은 어디 가셨죠?"
"몰라, 제깐 놈이 휑하니 가버리면 내가 뭐 겁 날 줄 알고?"
"가셨다고요?"
"댓돌 밑에 있는 신발이나 챙겨 들고 빨리 쫓아가봐"
"옛? 신발이요?"
 밖으로 나와 마루 밑을 보니 인촌의 구두가 있었다.
신발을 찾아들고 급히 골목으로 쫓아가 보니 인촌이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신발 신고 가셔야지요"
그러자 인촌은 깜짝 놀라며
"응? 내가 맨발로 나왔던가?"
피식 웃으며 신을 받아 신고 돌아서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사람이 도척 같은가? 사람이 가는디 붙잡지도 안다니?"
고하는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도로 올 사람을 잡기는 왜 잡어"
잠시후에 방에서는 인촌과 고하가 껄걸 웃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1945년 12월 30일 원서동 고하의 자택에서 울린 새벽의 총성은 고하를 앗아갔다.
범인은 한현우 등 여섯명이었다.
흉보를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인촌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고하! 고하! 나는 어떡허라고 먼저 가버린단 말인가. 고하 말 좀 해 보게!"
인촌과 고하 그리고 근촌은 소년시절 내소사 청련암에서 함께 공부를 한 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서로 도우며 헌신한 의형제였다.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는 고창 성내면 생근리 출생으로 동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동해서 옥고를 치뤘고
출옥 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동아일보 사장을 맡아서는 일본 총독부가 동아를 폐간시키려고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자 이를 거절,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다.
해방 후 한민당 총무, 제헌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냈다.
6.25가 터지자 모두들 피난 길에 나섰는데 근촌은 "나라가 위태로운데 도망은 무슨 도망이냐, 공산당이 오면 나라도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고집하다가 이북에 납치되어갔다.
인촌의 동지요 친구인 광주의 현준호가 있다.
호남은행 두취를 지낸 무송(撫松) 현준호(玄俊鎬)는 전남 창평 영학숙에서 인촌 고하 가인과 만났고 동아일보 취채역을 지냈으며 광주의전 설립에도
참가한 당대의 거부였다'
지금은 대궐 같던 그의 집이 한쪽 담만 남은채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 섰고 뒷편에 무송의 묘소가 있다.
6.25의 와중에 현준호는 내무서 정치보위부에 잡혀갔다.
그들은 이승만 신익희 조병옥 김성수 등을 '미제국주의 8적'이라 적어놓고는 현준호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무송은 그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김성수가 민족 반역자라고?  그야 말로 민족 애국자다. 그를 민족반역자라면 촌부들도 웃는다. 그의 이름이 끼어있는 한 나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
모진 고문을 받고 마침내 광주형무소 농장에서 학살 당했지만 그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훗날 현준호의 아들 현영원(玄永源) 부부가 병상의 인촌을 찾았을 때
"니가 영원이냐? 너희들 첫 인사를 내가 누워서 받을 수 없지."
 부인의 부축을 받고 앉아 절을 받고는
"나 땜에 느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너 알고 있냐?"
그러면서 울었다.
생전에 무송이 인촌의 생일상을 자기 집에서 차리겠다고 자청했다.
인촌은 좋다고 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호의는 고맙네만 반찬이 세가지를 넘으면 나는 안 먹을 테니 그리 알게"
그러나 막상 나온 생일 상은 진수성찬이었다.
인촌은 쓰다 달다는 말없이 일어서더니 휑하니 나가버렸다.
무송댁 상차림은 지금도 남도의 전설로 남아있다.
경주의 최부자가 현준호 댁을 찾아 대접을 받게 되었다.
안 먹어 본 음식이 별로 없다는 최부자였다.
8진미 5후청을 섭렵했다고 자만하던 그가 상을 받고 둘러보니 역시 모두가 알만한 음식들이었다.
그런데 단 한가지, 상 한가운데 자리에 흰 백자 그릇이 있고 그 복판에 작은 고약 같은 것이 놓여있는데 그것이 무슨 음식인지 도대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자존심을 접어놓고 최부자가 물었다.
" 저 가운데 놓인 음식의 이름이 무어라 예?"
무송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토하 알젓입니다.
토하(土蝦)가 무엇인가.
작은 민물 새우가 토하다.
그 작은 새우의 알로 담은 알젓이니 고약 한덩이만한 알젓을 만들려면 조금 보태서 작은 트럭 한 대분의 토하가 있어야할 것이었다.
인촌은 애국자요 공선사후(公先私後)의 민족 지도자이지만 스스로는 교육에 평생을 보내겠다는 것이 그의 바램이요 소원이기도 했다.
실재로 군정청에 보성전문 해산신청을 내고 1946년 8월 15일자로 고려대학교 설립허가를 받아냈다.
고려라는 학교명은 만주 요동벌판에 웅비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기려 인촌이 지은 것으로 고구려 세자 이름이 쓰기가 불편하다해서 고려로 교명을 정한
것이다.
고하의 서거이후 한민당은 선장을 잃은 배와 같았다.
한민당은 본인의 승낙도 없이 인촌을 수석총무로 선출했다.
그러나 인촌은 이를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등 여러 사람들이 설득에 나섰지만 그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가 계동 자택으로 인촌을 찾아갔다.
"고하를 잃은 슬픔이 크다는 것을 잘 알지만 두분이 만든 당을 저렇게 버려둘 수는 없지않소. 고하가 못다한 꿈을 인촌이 맡아 이루어야
하지않겠소. 해방된 조국에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이 고하의 꿈이었습니다. 인촌, 나라없이 학교가 어디있단 말이요. 나가서 우선 나라부터 건설합시다."
인촌은 마침내 한민당 수석총무직을 수락했고 아우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는 월 20만원씩 한민당 운영자금을 출연했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독선과 전횡, 그리고 부정부패를 보고있던 부통령 성제(省齊) 이시영(李始榮)은 부통령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하여금 더욱 무위하게 만들어 시위(尸位)에 앉아 국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 국가에 불충한 것이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창피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로 시작되는 '부통령자리를 물러선다'는 퇴임선언을 남기고 성제는 홀연히 떠난 것이다.
 민국당에서는 공석이된 부통령자리에 인촌을 내세우려 했다.
당시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뽑도록 되어 있었다.
인촌은 펄쩍 뛰었다.
"날더러 만인의 욕을 먹고있는 그 집에 시집을 가라고? 아예 그런 소리 하지마시오. 나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본인의 동의도 없이 동지들은 인촌을 추대했고 1951년 5월 16일 국회에서 김성수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인촌은 몰려온 기자들에게 "적임자가 아니므로 부통령에 취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민국당이 발칵 뒤집어 졌다.
낭산(郎山) 김준연(金俊淵)등이 설득에 나섰지만 거절당했다.
백봉(白峰) 나용균(羅容均)은 '영국신사'라며 평소 인촌이 그를 아끼고 좋아했다.
"부통령은 민의에 의해서 되신 겁니다. 선생이 아니면 부통령으로 이박사를 견제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뽑힌 것입니다. 이건 민의입니다.
민의를 외면하면 안됩니다."
백봉은 간곡하게 취임을 권유했다.
완강하던 인촌도 '국민의 의사'앞에 꺽이고 1951년 5월 18일 정오, 국회 본회의에 나가 취임인사를 하게되었다.
"민주정치는 독재정치와 달라서 어떤 영웅이나 우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민주주의 방법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그 실현을 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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