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만한 믿음











겨자씨만한
믿음

 

찬    송 : 204장

본    문 : 마태복음
17:14-20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될 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불굴의 정신입니다. 아무리
복지시설이 잘되어 있는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 영적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난과 질병, 고통과 억압과
같은 삶의 문제에 잘 대처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모범적으로 대처한 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예수님 자신도 광채 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은 신비한 경험을 한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속 머물지 않고
내려오신 것은 세상을 위한 봉사와 섬김을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고통과 어지러움의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때
등장하는 주인공은 불치병을 앓는 아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경배하는 자세로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삶의 우선순위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였는데 그 역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신앙교육의 중요성은 부모가 자녀들을 하나님과 만나게
하는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주목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무능력과 실패의 모습입니다.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실패 원인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을 참고해 보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믿음과 기도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 아버지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들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자라서 새가 깃들일만한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생명을 품고 있으며, 그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믿음을 심으면 믿음의 결실을, 예수님을 심으면 예수님의 세계를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불치병을 믿음으로 고친 아버지처럼, 그리고 귀신 들린 딸을 고친 수로보니게의 한 어머니처럼 믿음의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기도문

/양태윤 목사<군산성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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