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암의 수제자인 호산 서홍순










창암의 수제자인 호산 서홍순

  서홍순은 익산 웅포에 살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창암 이삼만에게 서예와 서법이론을 학습받았다. 그래서 근역서화징이나 구전에 보면 창암의 수제자로 널리 알려진 호남의 명필이다. 그러나
창암과 마찬가지로 후손이 미미한 관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또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여 사장되어 가는 서예가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서홍순은 그렇게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쉽게 사라질 서예가가 아니다. 그의 글씨와 많은 필적을 보면 대단한 가치가 있어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그의 가계와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홍순(1798-고종년간)은
대구(달성)서씨로 조선후기의 한학자이며 초서와 태서(苔書)로 유명한 서예가이다. 자는 경삼(敬三)이며 호는 호산(湖山)이라고 널리 사용하였으나
경진년에 쓴 ‘호산묵집’을 보면 글씨를 쓰고 지옹(芝翁) 인암(獜嵒) 구암(龜嵒) 한운(閒雲) 낭원(朗園) 등의
낙관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근역서화징에 보면 일명 진사(晋史)라고도 하였고 혹자들은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서진사”라고 하였다.


  서홍순의 5대조인 서종하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소론의 이인좌 일파가 일으킨 반란(영조4년:1728)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다 매를 맞고 죽었다. 그래서 당시의 조정 현실이
소론 계열의 호산 서홍순을 관직에 있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그가 “서진사”라고 불려진 사실로 보아 1822(순조 2년)에 초시에 급제하여 사마에 제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관직을 물리치고 낙향하여 서예활동과 후학양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아버지 충보(忠輔)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어려서 창암 이삼만(李三晩)에게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글씨공부하면서 닳고 망가진 붓이 큰 독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서홍순은 창암의 영향을
받아 기초적인 영자팔법과 기본획을 매일 연습하였고, 특히 서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마음속에서 붓질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창암을 잇는 서예가로
남게 되었고, 조선후기의 전북지방 서예가로는 전주의 이삼만(李三晩), 익산의 서호산, 남원의 강남호(姜南湖)를 3대 명필(三大名筆)로 꼽는다.
특히 서홍순은 세자(細字)에 능하고 초서를 잘 썼다.

 

호산의 서법

  일찍이 서법과 서예를 창암
이삼만에게 배웠으며, 말년에는 서폭(書幅)을 중원에 가서 팔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의 글씨가 널리 중국에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볼 때 서홍순은 중국에 가서 많은 서예자료를 구하여 왔지 않았을 까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초기의 호산필첩에는 낙관이
없거나 보통 세필(細筆)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중국을 다녀온 후에는 다양한 낙관을 사용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근역서화징에 보면 의주에서
객사하였기 때문에 언제 죽었는지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증손인 우운 서정민이 쓴 ‘호산공약력’에는 “향년 73세 졸(卒)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는 1798-철종간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소장한 호산필첩과 호산서첩을 살펴보니 간지가 갑자년(1864) 경진년(1880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도 향년 83세 즉 고종년간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

  호산이 83세에 쓴 ‘호산묵집’을 보면 중국의 서가인 동기창, 채양 등의 이름이 보이고 또 한국의 서가로는 한석봉 이광사 등의 글씨를 방서(倣書)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 즉 이렇게 중국과
한국의 서가들을 호산 서홍순이 접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바로 그의 스승인 창암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암 이삼만은 31세 되던
1800년(정조 24년) 전주에서 “화동서법”이라는 서첩을 간행하는데, 여기에는 송나라의 미불과 채양, 명나라의 동기창과 조선의 한호,
윤순, 이광사의 글씨가 실려있다. 본 서첩에 수록된 유묵은 모두 34편으로 각종 서체가 골고루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한호의 영자팔법과 왕희지체인
집자성교서로 서문을 집자한 것은, 서예의 기초를 익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가장 많이 수록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창암은 이광사의 글씨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듯 싶다.

창암이 만든 화동서법은 처음에는 전주 계남산방에서 음각본으로 간행하였으나 나중에는 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19세기 중 후반 경에는 서울에서도 양각으로 복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화동서법은 특히 창암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한
서예 교본으로 자신의 서재에서 사비를 들여 이 법첩을 간행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홍순이나 모수명 같은 창암의 제자들은 이 “화동서법”의 목판본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학습하여 동국진풍의
서맥을 이은 서가들이다.

  동국진풍의 서풍은 주로
진경시대에 널리 유행한 서풍을 말하는 것으로, 즉 중국의 문화를 유입하더라도 우리 나라에 맞게 소화하여 일구어낸 것을 통틀어 동국진풍이라고 한다.
즉 동국진풍의 서맥을 형성한 사람으로는 옥동 이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등을 들 수 있고 좀더 나아간다면 호산 서홍순도 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도 우리 나라의 풍토에 맞게 재해석한다면 동국진풍의 서맥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서홍순의  예술과 후대의 영향

  서홍순은 익산 웅포에서
태어났으나 주로 활동한 곳은 함라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가 소장한 ‘호산필첩’은 갑자(1864)년에
함라 산중에서 간행한 것으로, 모두 6질로 되어있으나 후반부는 없고 전반부 3권은 모두 완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원래 모두 총
1,200자로 초학자들이 덕을 닦은 내용을 가지고 목판본을 간행하였고, 아마도 함라에서 후생들을 위해 목판본을 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호산필첩은
서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매 권마다 서법에 관한 이름을 붙였는데, 즉 노봉(露鋒) 은봉(隱鋒) 중봉(中鋒) 측봉(側鋒) 도봉 등이며 맨
끝에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글자를 기록하고 있다.

  서홍순의 ‘호산필첩’에서 보면 항상 덕과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글자의 자형은 대체적으로 약간 옆으로 넙죽하며 안정적 형세를 취하고 있으며, 글자의 획과 획이
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홍순은 “호산묵집”에서 보면 그야말로 깨알 만한 글씨를 썼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태서(苔書)라고 부른다. 그의 작은 글씨는 가는 머리카락과 같아서 조심하지 않고 보면 태지(물이끼와 닥을
섞어서 만든 종이)와 같아 글자가 없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그야말로 붓끝의 힘이 종이에 닿아 한 획 한 획을 모두 갖추고 있다.

  서홍순의 필법은 아들 호암
서상용에게 이어졌으나 아쉽게도 28세에 졸하였고, 손자인 우운은 난초를 잘 하였고, 증손인 호운 서정민(1875-1959)은 모친 강씨의 무릎에서
천자문을 암기하고 서화를 잘 하였다. 즉 4대에 걸쳐 학문과 예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홍순은 한시에도 능한
서예가로 서예의 교본을 편찬함과 동시에 많은 유묵을 남겼으며, 현존하는 편액으로는 웅포의 덕양정과 여산의 사찰 편액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익산 웅포에 있는 ‘덕양정’은 앞에 도도히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가 있고, 이곳은 고려 우왕 6년에 외선 500여 척을
무찌른 곳이기도 하다. 이 편액의 서자는 호산 서홍순으로 이 고장이 낳은 명필이다.

 

 

 

 

 

 

 

 

 

 

 

‘호산필첩’은 호산 서홍순이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서예교육용 자료로 간행한 목판본이다. 이 것은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호산의 묵적으로 모두 총 6권으로 되어있으며, 문장은초학자들에게 덕을 함양하는 내용이다.

 

 

 

 

 

 

 

 

 

서홍순이 경진년(83세)에 쓴 “호산묵집”에서 태서(苔書)가
있는 부분이다. 이 태서는 아주 작은 글씨로 마치 머리카락 굵기 정도로 가늘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