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목사님(











히딩크
목사님(?)

 

우리
고산읍교회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선교원 운영이다. 현재 8년째 운영하고 있으나 아이들
모집에 한 번도 괴로움을 당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선교원 교사들의 부탁이 광고하지 말아 달라는 거다.  고산 지역에 유치원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의 유치원과 우리교회
밑에도 어린이 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오는 것이 신통하다.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의 은혜요 넘치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시골의
이런 자그마한 선교원에도 월드컵의 열풍이 지나갔음을 실감나게 한 적이 있었다. 바로 몇 주 전의 얘기다. 점심시간이면
모든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나와 서로 서로 주고받는다. 한 번은 그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공을 차며 신나게 놀아주었다. 그랬더니 어떤 녀석이 날
보고 “히딩크 목사님!”하고 부른다. 그러자 너도 나도 “히딩크 목사님”을 연호한다. 그래서 아이들 앞에서 히딩크 목사가 되었다. 결코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시일이 점점 지나면서 히딩크 목사란 말이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명성, 그의 인기, 그의 외모 때문인가?
아니면 천진스러운 아이들이 그렇게 한 번 불러 주었다는 게 좋아서 일까? ‘아니다’라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확실한 지도자상이 부족한 이 시대에
내가 맡은 작은 교회에서나마 확실한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게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해서 늘 생각하게 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브루스
라슨(Bruce Larson)은 ‘바람과 불’이라는 책에서 지도자의 역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대륙을 건너서
먼 거리를 날아오는 새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현저한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지도자를 교대로 세운다. 그 어떤 새도 항상
전면에 나설 수는 없다. 둘째, 그들은 거친 바람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리의 새가 인도해 가는 동안
나머지 새들은 격려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따라간다는 것이다.

히딩크를
바로 알면 영향력 있는 지도자, 리더쉽이 확실한 지도자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난 히딩크 목사(?)란
말이 괜찮고 천진스러운 아이들이 붙여 준 별칭이 고마울 뿐이다.

/한성덕 목사<고산읍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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