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2002년: ‘성소재림’, 블록버스터에 대한 오해










한국영화
2002년: ‘성소재림’, 블록버스터에 대한  오해 

영화 ‘쉬리’가
후세 영화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때, 이 영화의 작품성이나 감독의 작가성 혹은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를 논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쉬리’
가 우리 영화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영화가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제작방식과 마케팅 전략을 모방하고 우리 식으로의
수용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만 해도 으악했던 40억에 가까운 제작비의 모험, 제작단계부터 조직적으로 전개된 홍보전략,  제작과 상영기간 내내 유지해 왔던 한석규와
최민식의 스타이미지 관리 등등. 

그러나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을 나는 감독 강제규의 상업영화를 보는 방식에서 찾는다. 이미 ‘은행나무 침대’로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던
그는 ‘쉬리’ 시사회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서 나라는 작가는 없다”라고 용감하게 말했다.

‘쉬리’는 강제규 감독에게
예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가 하는 상품이었다. 그래서 ‘쉬리’는 영화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투자비만 조금 올라가면
작가치레를 하려했던 이전의 감독들과 대조되었다. 

‘쉬리’는 블록버스터에
대한 의식과 실천의 결합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블록버스터에 작가의식이나 예술적 실험성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블록버스터의 생산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올해는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던 한
해였다. ‘예스터데이’와 ‘아유레디?’ 같은 대작영화들이 흥행에서 실패를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충격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참담한 흥행실패였다.  

순제작비
90 억원에 마케팅 비용만 20억원 총 110억원이 투입됐고 흥행에 실패해 본적이 없다는 장선우 감독이었기에 그 여파는 더 컸다. SF액션을
표방하고 게임의 세계와 현실을 자유롭게 오가는 실험성(?)에 ‘매트릭스’에서 차용한 가상 액션이라는 장르적 관습을 연계시켰다. 

그래서 오늘날 20대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 초부터 시작된 철저한 관객들의 외면
때문에 상영일수가 짧아 조금만 게을렀으면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는 기회를 나 역시 영원히 잃어버릴 뻔했다. 

이 영화의 상업적으로 실패했던 원인을 나는
조심스럽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스토리의 혼란함(복잡함과 차별적 의미에서)이다. 현실 속
인물인 ‘주’는 게임방 소녀 ‘희미’를 좋아하고 그녀를 닮은 ‘성냥팔이 소녀’로부터 건네 받은 라이터에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는 게임의
접속번호를 알게 되고, 그는 ‘성소’의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이 게임으로 진입한다. 

‘파적’ 김정구의 시가 오프닝 되면서 시작되는
영화는 이후 관객들을 스토리 라인에 동참하는데 무척 힘들게 만든다. 우리는 SF액션의 대명사 ‘스타워즈’가
단순한 스토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른 원인은 영화의 마케팅 전략의 상징적 도구인 포스터에서 찾을 수 있다. 


‘성소재림’이 개봉
전 반복적으로 제시했던 포스터는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성소가 기구를 타고 하늘로 승천(재림의 반대인)하고 그 밑에는 광대분장을 한 악사들이 연주하는
“전위적” 그림이었다. 

포스터에는 대중들이 체질적으로 혐오하는
아방가르드의 분위기가 충만하다. 영화는 그래서 개봉 전부터 이상하리만큼 일반 관객들의 감정 섞인 비난을
받아왔다. 실험적 아방가르드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나쁜 영화’, ‘거짓말’에서 부터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왔던 장선우 감독의 전력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 

세월이 흘러 ‘성소재림’이 한국영화사에 기록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영화의 전위적 실험성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