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촌 조병희 선생이 떠나던 날 표정










작촌 조병희 선생이 떠나던 날 표정

전북의 큰 어른 작촌 조병희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나던 날은 하늘도 초조했나 보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더니, 운구행렬이 나서자 뽀얀 얼굴을 내밀었다.

19일 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씨가 당선돼 온통 축제의 도가니로 떠들썩한 날,
선생은 그렇게 익산 삼기면 연동리 선영에 조용히 묻히셨다.

이날 영결식장에서는 김남곤 예총회장, 정순량 우석대 대학원장(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박금규 원광대 박물관장(신임 전라시조문학회 회장) 등 몇몇 문인들이 모여 간단한 문화행사를 갖고 고인을 기리기도 했다.

정순량 시인이 고인의 약력을 읽었고, 박금규 관장이 조사를 낭독했다. 또 선생의
손자에 의해 마지막 공개시 ‘다가공원’과 병상의 단상을 시로 옮긴 ‘병석에서 보는 티브이
영상’이 낭송되기도 했다.

정순량 대학원장은 “큰 어른을 떠나보내면서 여러가지로 송구한 점이 많다”면서 “문화단체들의
무관심으로 문화장 등 형식을 갖춰 예를 다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시조시인들의 마음을 모아’라는 조촐한 행사가
있었기에, 그나마 쓸쓸하게 떠나는 선생의 마음이 외롭지 않았으리라. 영결식장에 모인 150여명의 조문객은 떠나가는
선생을 추모하며 평안히 잠드시길 기원했다. /김영애기자 young@

 

작촌 조병희 선생의 생애

지조와 꿋꿋한 선비정신을 지켜왔던 작촌 조병희 선생은 향토사가로서 그야말로 이 지역의 산증인이었다. 선생이 남긴 업적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선생은 도내의 관혼상제, 비문, 이미 잊혀진 지명과 인물 등 어느 한 부분
소홀함 없이 추적하면서 향토문화사를 정리했다.

선생은 1910년 충남 강경에서 태어났지만, 다섯살 되던 해부터 부친이 전주제일공립보통학교로 부임하면서 전주로
옮겨와 눌러 살았다.

전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전주고등보통학교를 나와 한때 그림과 사진에 몰두하기도 했던 선생은 이후 서예와 시조·문화재연구에
전념, 한국문인협회·시조시인협회·표현문학회·전라시조문학회·향토사연구회 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런 선생에게 각 단체들은 전주시민문화상(1981), 전북도민문화상(1988),
제14회 표현문학상(1999), 제1회 전북의 어른상(KBS전주방송 총국 제정)으로 보답하기도 했다.

전주시 다가동 고택에서만 60년 넘게 살았던 선생.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늘 반갑게 맞아주었고,
향토문화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친절하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고령에도 일기쓰는 일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다스렸던 선생은 말년엔 ‘작촌 한시집’ 탈고에 매달리는
열정을 보였다. 떠나시기 얼마 전 후진들은 선생의 작품을 모아 시조집 ‘해거름에 타는 불꽃(이삭)’을 증정하기도 했다.

선생의 향토문화에 대한 관심을 이어받은 셋째아들 조정형씨는 배와 생강을 이용한 전북의 대표적 민속주인 ‘이강주’를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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