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서화를 중흥한 석정 이정직(상)










  전북 서화를 중흥한 석정
이정직(상)

 

전북서화의 반석을 다진 석정 이정직

  오늘날 예술가들은 전라도의
서화를 말할 때 남도는 그림이고 전주는 글씨라고 한다. 즉 그림의 남도에서는 공재 윤두서를 비롯한 소치 허유 등이 기반이 되어 그의 아들인 미산
허영과 손자인 남농 허건까지 맥이 연결된다. 그러나 전북은 누가 그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잘 거론하지 않고 또 잘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윗대의 송재 송일중과 창암 이삼만이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였고, 그후의 석정 이정직(石亭·李定稷) 전북서화사의 반석을
다지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석정은 호남평야의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김제에서 성장하면서, 예술의 끼와 학문적인 정수를 갈고 닦았다. 평야지대는 산간지방에 비하여 쌀이 많이 생산되므로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자연스럽게 서울의 유명한 문인묵객들이 출입하였고, 그리하여 심층적인 학문 토론과 서화의 예술세계가 다른 지방보다 쉽게 발전하였다.
그래서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서화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김제와 만경은 아주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그러나 점점 문화의 발달과 분화로 인하여 문화의
중심 축이 전주로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서예(書藝)로 유명한 곳을 지목할 때는 무조건 ‘전주’라고 하는데,
사실 그 뿌리는 ‘김제’이며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석정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석정은 구한말에 태어나
갑오개화기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항상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로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많은 저서와 제자들을 배출했다. 석정 저서의 대표적인
것은 유고집인 『연석산방미정고』『연석산방미정문고』『연석산방미정시고』25책을 비롯하여, 단편 저서인 『전가록』『소여록』『간오정선』『작가지남』『척독역지』등이
남아있다. 이러한 석정의 저서는 모두 15종 30책으로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49호로 지정되어있다. 이러한 중요한 자료를 몇 년 전부터
김제시에서 지원하고 김제문화원에서 주관하여, 석정이 남긴 필사본을 『석정이정직유고(4권)』라 번역하여 2001년도 12월에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학계와 예술계에서 학술적인 기초자료로 귀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석정의 생애와 학문

  석정 이정직(1841-1910)은
현재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선략장군 용양위부사과(무관직)를 지낸 아버지 경농(經農) 이계환(李啓煥)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3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형오(馨五)이고, 호는 석정(石亭)이며,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석정의 아버지는 경기도
김포에서 무관직과 관련된 직책에서 공무를 수행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즉각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경하였다. 그러한
그가 어떤 일이 있어 김포에서 김제 요교 마을로 이거하면서 석정은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석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세에 부친이 천자문을 가르치면 수 십자를 깨우치는 재기를 발휘했고, 또 5세 때도 부친이 글을 써 보라고 하면 글씨의 종횡이 딱 맞아, 더 이상
조숙을 꺼려 가르치지 않았다. 드디어 9세가 되어 시문에 능한 최학붕에게 사숙했고, 또 11살과 12살에는 부친에게서 맹자와 논어를 배웠다. 그
뒤에도 태인의 강회민 선생으로부터 역학을 배우고, 금구의 안정봉으로부터 대학과 중용 등을 배워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안정봉은 성학(聖學)이
진정한 실용의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육예의 학습이 겸비되어야 하고, 또 우리가 의식주에 필요한 생활용구에 대한 과학적 지식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며, 새로운 문화와 문물에 대해서도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정신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석정의 학문은 물론 여러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부친의 영향이 누구보다도 가장 컸다. 부친은 석정이 도학보다는 문장학을 공부하여 시문에 힘쓰는 공부를 권장하였고,
또 학문의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좋은 스승을 추천하였다. 또 자신이 『논어』를 가르칠 때는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된 까닭을 모르고, 사람된 까닭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입으로
읽는 것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만 못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몸으로 체득함만 못하다” 고 훈계하였다. 이 말은 뒤에 석정이 평생 학문하는 자세의 지표가 되었다.

 

  석정의 연경행과 그의 사상


  석정 학문에 대하여 그의
제자인 유재 송기면이 쓴 비문에 의하면 석정은 28세(고종 5년 1868년)에 연경을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정은 이때 연행사 어영대장 이봉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1년동안 서점집에 숙식을 하면서 기거하였다. 이때 석정은 많은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제자백가서를 두루 살펴보았고, 서양의
학문(칸트와 베이컨)과도 접하게 되었다. 그가 말년에 “연석산방”이라고 당호를 붙인 것도 연경과 관련이 있으며, 그는 실학사상을 싹 띄우고 자라게 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석정은 연경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자료를 구해왔으며, 서화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각종 필첩(왕희지 필첩, 동기창 전찬
및 낙의론, 안진경 필첩 등등)과 화첩를 구해왔고 또 많은 탁본을 수집해왔다.

  석정은 실용적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농기구나 우물 등을 손수 제작하였고, 직접 마당의 바위에 별자리를 기록하기도 하고 이것을 책에 옮기기도 하였다. 특히 한의학에 관심이
지대하여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또 살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제세구민(濟世救民)하는 정신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한의학은 그의 제자인 유재에게
이어졌고 또 유재의 손자인 아산 송하영을 거쳐 그의 집안에 이어지고 있다.

  석정은 대화하기를 좋아하여
사상적으로 통하는 학자와는 사는 곳의 원근을 가리지 않고 왕래하였다. 특히 해학 이기, 매천 황현과 평생토록 친교를 맺어 학문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하였다. 그는 연경을 다녀와서 무엇보다도 학문의 방향을 도학에서 실학으로 바꾸었고, 20세 때부터 많은 집필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94년에 동학농민군들에 의하여 전주의 집이 불타버려 대부분의 저술이 없어졌고, 이때 연경에서 접한 칸트와 베이컨에 관한 저술 등도 모두 소실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석정은 다시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 “연석산방”으로 귀향하여, 집필과 후학양성에 혼심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1894에서
돌아간 해인 1910년까지 약 15년에 걸친 역작이다.

  석정은 저술을 좋아하여
반드시 옛 것을 법으로 삼았는데, 문은 구양수를 따르고 시는 두보를 흠모하였다. 서는 왕희지를 법으로 삼고 미불과 동기창을 드나들었으며, 특히
구양순의 해법에 더욱 정력을 쏟았다. 석정의 글씨나 그림은 거의 대부분 연경에 다녀 온 이후의 작품으로, 많은 법첩을 공부한 이후에 나온 법서(法書)이다.
그는 연경에서 모든 사상적 기반과 예술관을 확고히 다진 다음 작품에 혼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또 경학 이외에 다방면에 고루 출중하였는데,
대략적인 것만 열거한다면 음양(陰陽) 복서(卜筮) 의학(醫學) 성력(星曆) 율산(律算) 자음(字音) 도서(圖書)등에 모두 밝았다. 즉 그는 실학적
정신의 토대 위에 실제로 학문을 생활화했던 것이다.

 

 

 

석정 이정직 생가(연석산방)는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 있는 초가집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 2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지만 석정의 증손자인 이명석씨에게 미리 전화로 연락 하고 가면, 석정에
대한 자료와 함께 깊이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사진의 왼쪽 하단부에 우물이 보이는데, 이 우물은 석정이 손수 실학정신에 입각하여 판 우물이다.)


 

석정이 말년에 집필한 유고집으로 1995년 전라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149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현손인 이종석 교수가 보관하고 있는데, 2001년도 김제시 문화원에서 번역작업을 하여 출판했다.

 

석정의 병풍서로 동기창과 미불의 서법이 가미되었다. 필획이 단정하고 청허(淸虛)한
맛이 있다. 이것은 석정이 연경에 갔다 온 후에 많은 자료를 보고 자가적인 서풍을 확립한 상태에서 나온 작품이다.

 

석정 이정직의 초상화이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