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2002 (3): 확장과 깊이










한국영화 2002 (3): 확장과 깊이

 

2002년은 미래의
한국영화사에서 끊임없이 거론되는 해가 될 것 같다.  3년 전부터 시작 된 국내영화의 붐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산업적 인프라의 형성과
영화인들의 예술적 내공이라는 ‘실체적 힘’에 의한 것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스크린 수가 1천 개에 육박했고, 조폭 영화가 주류를 이루기는
했지만 ‘집으로...’와 같은 비주류영화도 언더그라운에서 나와 대로를 걸었다.  장르의 지평은 그만큼 확장되었다. 

나는 올해 들어서야 내가 민주화된 나라에
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민주주의는 교과서에만 있던 남의 얘기였다.  88 올림픽 이후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정부에 의해 민주 국가에 살고있다고 홍보하는 가면 민주화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2002년 내 몸이 직접 그것을
감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6월의 붉은 물결과 미군 여중생 사건이 촉발시킨 횃불 시위는 그런 “신체 민주화”의 한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나는 그 느낌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가 바로 그것.  전주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복잡했었다.  노인들의 애정을 카메라는 가장 은밀한 곳까지 접근해서 다큐멘터리처럼 세세하게 보여준다. 
개봉을 앞두고 논란이 시작되었다. 영화물등급위원회에서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부여했고 이어 거센 항의와 비판이 뒤를 이었다.  세 명의 위원들이
사표를 내기도 했다.  사실 논란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 보다 논의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금기의 영역이 축소됨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점이 중요했다.  이제 한국영화에서 다루지 못할 것은 없다는 의식의 확장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영화가 국제적으로 확장되는
한 해였다.  몇 달을 사이에 두고 ‘취화선’의 임권택 감독이 칸느영화제에서 그리고 ‘오아시스’의 이창동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각각 영화제의 핵심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할리우드의 오스카가 미국내 영화에 한정된 것 생각하면 칸느와 베니스 영화제는
실질적인 양대 산맥인 셈이다.  감독상을 수상했지만 두 영화의 색깔은 아주 이질적이다.  이창동 감독의 수상은 보다 의외로 다가왔고
의미도 더 깊었다. 임권택 감독의 경우는 이미 ‘춘향뎐’으로 칸느에 상당히 접근해 있었고 ‘취화선’은 유럽영화 관객을 매료시킬 만한 
동양적 사유와 미학을 담고 있었다.  ‘낯설음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점이 유럽영화제에서 충분히 작용했을 것이다.  반면 
‘오아시스’는 소외된 존재라는 평범한 주제에서 출발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라는 면에서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오아시스’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배우들의 광적인 연기와  영화 내내 지속되는 들고 찍기의 카메라 연출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배우와 카메라를 적절하게 만나게 하는 것은 감독의 역할이고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이창동의 능력이다. 

올 한 해가 한국영화의 확장의 시대였다면
당연히 우리는 깊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넓이는 깊이에 의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깊이의 상당부분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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