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빌어먹을 놈이










이 빌어먹을
놈이

 

난 시골
태생이다. 형제만 다섯 인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는 진손녀까지 보고 돌아가셨다.

대전에서
목회를 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4학년이 되면서부터 그만 두셨다. 그 해부터 가산이 기우러져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내가
살던 삼유리에서 안천까지 12km, 그 거리를 걸어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시외버스 요금이 안천까지 7원,
그러나 학생들은 5원이었다. 왕복 10원이면 통학버스를 타고 편안히 다닐 수 있었지만 버스를 타는 것이 왠지 사치스럽게만 느껴지던 시절이다. 학교
가는 길이 평지 같으면 자전거라도 타고 씽씽 달리련만 큰 고개를 두 개, 또 얕으막한 고개를 두 개 넘어야 하는 산악지대이다.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우리의 잰 걸음으로는 2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참으로 험난한 통학길이다. 그리고 한산한 도로에 가뭄에 콩나듯 이따금씩 지나가는 자동차지만 단
한 번만 지나쳐도 히뿌연 먼지를 까아만 교복에 발라놓고 달아난다. 어떤 때는 흙탕물을 퍼 붓고 질주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텐데 괘씸하고
흥분한 우리는 욕을 퍼 부으며 ‘쑥덕 감자’를 먹여 댔다. 그러면서 흙먼지를 털어내며 "에이 빌어먹을 놈" 하곤 했었다. 이런
욕을 먹었던 그 기사들이 빌어먹고 사는지 부자가 되어 사는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생각난 김에 그저 용서를 구하고 부자로 살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 못된 욕설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덕분이리라.
우리 할아버지는 곧잘 "이 빌어먹을 놈이"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 물론 그 속엔 손자를 나무라시는 훈령도, 똑바로 행동하라는
질타도, 훌륭하게 되라는 손자에 대한 바람도 있으리라 믿는다. 어느 누가 거렁뱅이 처럼 빌어먹는 손자가 되길 바라겠는가? 다만 애정어린 표현이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이 소리를 들으셨다. 그러자 대뜸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님은 그래, 손자들 빌어먹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신가요?" 그 후로도 할아버지의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모두가 잊혀진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간간히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이젠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 빌어먹을 놈이" 하시는 할아버지
같은 애정어린 소박한 말을 들을 길이 없다. 그저 어릴 적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한성덕 목사<고산읍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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