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하얀 꽃, 그림자 마을










단편소설
- 하얀 꽃, 그림자 마을

 

1

아내가 집을 나간 지 보름 가량 되었다. 아내의 가출 이후, 나는 하루 종일 외출하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혼자 있게 된 이후부터 나는 줄곧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거실로 스며드는 햇볕마저도 싫게 느껴져, 한낮인데도 늘 커튼을 두껍게 드리웠다. 커튼을 깊게 드리우고 나면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어둠 속에 묻혀 있으려는 내 의도와는 달리 한낮의 햇볕은 집요하게 거실을 파고들었다. 햇볕은 창 중앙부위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스멀스멀 살갗을 파고드는 거머리처럼 거실 안쪽으로 몰래 기어든 그 볕은 발목을 적시고 무르팍으로까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곤 마치 경멸하는 듯한 푸르스름한 낯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향원’ 이라는 그 여자를 죽음 바깥으로 불러내면서까지 날 우롱한 거예요.
당신과 내가 함께 살아왔던 지난 6년 동안 내내…당신은 잠자리에서조차 나 아닌 그 여자의 흔적을 찾아 헤매었어요. 내 살갗 구석구석을 혀로 핥으면서
당신은 향원이라는 그 여자의 기억을 더듬거렸겠죠.”

“…….”

“게다가 내 몸에 이식된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여자의 몸을 헤엄쳤을 테고… 어쩌면 그럴 수
있죠? 당신은 위선자예요. 단 한번도 나를 당신의 여자로 여기지 않았으면서도 끝끝내 적당한 거리에서 나를 구속해 두려고 했던 위선자! 이중인격자!”


아내의 목소리가 성난 파도처럼 내 고막으로 밀어닥쳤다. 나는 파도에 얻어맞은 바위처럼 몸이 굳어졌다. 그
순간 나는 휘청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내는 그런 나를 외면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그리고 미련 없이 집을 떠났다. 모든 게 한 순간이었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아니 이미 오래 전에 예견돼오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온 것뿐이다. 정리되지 않은 기억을 적당히 덮어두고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내 삶은 이미 균열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고 나자, 더는 날카로운 빛의 눈동자 같은 아내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두운 망막의 세계에 떠오른 것은 날카로운 빛의 눈동자보다 더 시린, 열여섯의 어느 여름 날 그리고 그 이후의 환영(幻影)들이었다.

2

예리한 작살 촉처럼 날카로운 8월의 뙤약볕이 냇가로 쏟아져 내린다. 푸른 물줄기들이 거친 숨을 헉헉거린다.
냇가 주위의 자갈들은 햇볕에 익어 온통 하얗게 질린 얼굴이다. 그 자갈밭 위에 백목련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십팔 세 가량의 여자 애가 누워 있다.
그녀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한 여름의 붙타는 태양만이 광기에 사로잡혀, 이미 삶의 뜀박질을 멈춘 그녀의 가슴을 향해서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대고
있다.

“향원이가 죽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소리지른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의 아우성. 삽시간에
냇가에는 소란이 인다. 뜨거운 태양 볕이 쏟아지는 자갈밭 한가운데에는 용바위 깊은 곳에서 막 건져 올려진 향원 누나가 미라처럼 누워 있다.

“저, 정말 죽, 죽었어!”

동네 형들이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비명을 지른다. 비명을 지른 뒤 동네를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는 발걸음들.
오래지 않아 형들은 향원 누나의 엄마나 아빠 그리고 동네사람들을 데리고 이리로 구름 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용바위 냇가에는 향원 누나와 나만 남아 있다. 나는 누나의 예쁜 가슴으로 쏟아지는 잔인한 햇볕을 막기 위해
거기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누나의 예쁜 가슴은 얼음처럼 차갑다. 여전히 누나는 숨을 쉬지 않는다. 참말……. 믿고 싶지 않은… 향원 누나의 죽음은
사실인가 보다. 울컥 눈물이 솟는다. 눈물 한 방울이 투두둑 누나의 예쁜 가슴 위로 떨어진다. 정말 누나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도 상처 하나 없는
누나의 얼굴은 곱기만 하다. 얼굴 뿐 아니라 목, 가슴, 팔, 다리 그 어디에도 흉한 상처 같은 건 없다. 바위에 긁힌 조그마한 생채기 하나 없다.
그런데도 누나는 숨을 쉬지 않는다. 정말 죽어 버린 것이다.

이른 봄날에 하얀 목련 꽃잎이 바람에 소리 없이 지듯, 그 해 여름 누나는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원 누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하얀 꽃이 된다는 것! 향원
누나가 화장터로 실려 간 그 날, 사람들은 하얀 국화나 백합 같은 꽃을 누나의 사진 앞에 가져다 놓았다. 누나는 그 꽃들을 정말 볼 수 있을까?
누나의 몸은 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얼마 후 잠잠해졌다. 누나는 하얀 꽃 이파리 몇 점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아! 사람은 죽으면 모두다 저렇게 하얀 꽃이 되는구나. 나는 재가 되어 버린 누나의 몸을 보면서 ‘하얀 꽃’ 을 떠올렸다.


 

시시때때로 향원 누나는 나의 방으로 찾아왔다. 열여덟 살이 되던 그 해 여름. 생의 성장을 멈추어 버린 누나와
달리 나는 열여섯 이후에도 계속 성장을 했다. 나의 샅 한가운데로 검은 수풀 같은 거웃이 무성하게 웃자라기 시작했다. 그 숲이 무성해지면서 누나가
나를 찾아오는 횟수도 점점 늘어갔다. 누나를 만날 적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면 누나는 나를 이끌고 용바위 냇가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서면
언제나 향긋한 풀꽃의 냄새가 나고 내장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맑은 시냇물 소리가 귀를 맑게 했다. 냇가를 가로질러 산비탈에 들어서면 새들이 호로로
놀라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자지러지듯이 산이 웃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 소리를 가만가만 들으면서 누나와 나는 스펀지처럼 푹신푹신한 숲의 품에
벌렁 드러누웠다. 누나와 내가 숲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숲에서는 온갖 풀꽃 향기가 가득했다. 그 풀꽃 향기는 소곤소곤 속삭이는 누나의
목소리가 되고, 맑은 시냇물 소리도 되어 나의 가슴으로 졸졸 흘러내렸다.

“저것 좀 봐.”

누나가 손으로 상수리나무를 가리킨다. 그곳에는 푸른 이파리 사이로 하얀 웃음을 짓는 햇살들이 있었다. 하얀
이를 드러낸 햇살들은 이파리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푸른 빛 이파리 뒤로 몸을 숨긴다. 잠시 후 햇살은 누나의 얼굴에 걸터앉아 히득히득
웃는다. 그리곤 나의 얼굴로 옮아와서 또다시 히득거린다.

어느새 누나의 하얀 웃음이 햇살에 반사되어 숲을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나는 달아나는 누나의 웃음을 좇아 숲을
달린다. 누나는 소리가 되어 숲을 달린다.

“누나, 같이 가.”

“아니, 네가 날 잡아 봐.”

누나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숲 한가운데에서 서 있다.

정적.

나는 소리도, 빛도, 향기도 사라져 버린 숲의 한가운데에 서서 가슴을 졸이고 있다. 누나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 때 발목부위로 무언가가 꿈틀꿈틀 기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칡넝쿨이다. 칡넝쿨이 웃는다. 누나가 웃는다.

“나야. 이번엔 네 차례야. 네가 내 몸을 휘감아 봐.”

나는 누나의 몸을 칭칭 휘감는다. 지면을 향해 수평으로 길게 몸을 늘어뜨린 누나와 달리 나의 몸은 누나의
중심을 향해 수직으로 수직으로 기어오른다. 나의 다리 사이 검게 웃자란 거웃들이 바람에 일어선 풀들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누나의 중심을 질러보고
있다. 나의 몸이 누나의 숲 입구에서 잠시 주춤한다. 누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의 몸 한가운데로 나의 넝쿨이 쏘옥쏘옥 밀려들어간다.
숲은 풀꽃 향기와 함께 비릿한 꽃내음을 내뿜고, 시냇물 소리는 누나의 비명소리와 뒤섞여 수상한 메아리를 만들어낸다.

3

법성면 진내리 굼방모탱이 벼랑.

벼랑에 서니 남쪽 해안선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해안선은 낯선 이의 눈길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먼 곳으로부터
해풍을 불러들인다. 갑자기 밀어닥친 해풍 때문에 머리칼이 어지럽게 흐트러진다. 해풍은 내 머리칼 뿐 아니라 개펄에 단단하게 촉수를 들이박은 선박의
머리채까지 휘어잡곤 그것을 사정없이 뒤흔들어댄다. 무슨 일일까? 바닷바람이 이처럼 노엽게 세상을 뒤흔들어대는 이유는…나는 해풍이 휘젓고 다니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만 몸살을 앓는 게 아니라 바다도 몸살을 앓고 있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바람이 된다. 시베리아 혹은 대양
어느 곳에서 일어나 정처 없이 먼길을 달려 왔을 바람. 나는 손아귀에 뱃머리를 휘어잡고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어디선가 코에 익은 화장수 냄새가 난다.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뜬다. 이 굼방모탱이 벼랑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여자가 다가와 있었다. 어제 만났던 그 여자다. 여자는
어제보다는 훨씬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본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그녀의 입 언저리에 파문 같은 보조개가 패인다.

“오늘은 혼자시군요. 노부인께서는...”

나는 인사치레로 그렇게 묻는다.

“네. 어머닌 광주에 볼일이 있으셔서 오늘 아침에 나가셨어요. 내일쯤에나 돌아오실 거예요.”

내일쯤에나….그녀는 노부인이 돌아오는 때를 나에게 소상하게 일러준다. 마치 내가 그녀 어머니의 행방을 먼저
묻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그녀를 만난 건 어제 법성으로 오는 직행버스 안에서였다. 멀미 때문인지 내가 앉은 좌석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그녀는 갑자기 토악질을 해대었다. 그녀 곁의 노부인은 그녀의 갑작스런 토악질에 당황한 듯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구하려는 눈빛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눈빛,게다가 오한까지 느끼는지 그녀는
움찔 몸을 떨면서 내가 내민 손수건을 힘없이 받아든다. 파랗게 물이 든 창백한 그녀의 입술 그리고 하얗게 표백된 피부. 어둡다.

“고맙구려. 젊은이. 나 원, 갑자기 토악질을 해버리면 어떡허누.”

노부인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연신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마치 곁에 있는 그녀의 미안한 감정까지도
모두 대신하려는 마음 같다. 노부인은 내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술 주위를 정성스레 닦아낸다.

여자는 차창 너머에 있다. 그녀는 해안선을 따라 가로로 길게 늘어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 속에 끼여 있다.
나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우우 하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건네 오지만 그녀의 입술은 꼼짝하지 앉는다. 그녀의 고정된 시선만이 나무의 살갗을
파고들 듯 집요하게 그것들을 향하고 있다. 꽉 다물린 입술과 나무들을 향해 열려 있는 그녀의 눈동자. 나는 차창에 부각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무들이 아니다. 그녀의 눈은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수상한 눈빛으로 그녀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치는 정황을 재빠르게 포착하고 있다.

직행버스는 법성터미널에 닿는다. 손님들이 하나둘 차에서 내리고 이윽고 노부인과 그녀가 함께 차에서 내린다.
잽싸게 택시 한 대가 그녀들 앞에 멈추어 선다. 그녀들을 태운 택시가 그대로 터미널을 빠져나가는 듯 싶더니 이내 나의 앞에 멈추어 선다.

“깜박할 뻔했구려. 이 손수건을 돌려 줘야 한다는 걸. 아깐 너무 고마웠어요. 괜찮다면 우리랑 저녁식사라도
같이 했음 싶은데요.”

노부인 곁의 그녀가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다.

“원 별 말씀을…호의는 고맙지만 전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그렇군요, 그나저나 이 손수건까지 그냥 가져가서….”

“괜찮습니다. 별로 값나가는 것도 아닌데요. 그럼 이만….”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나를 주시하고 있다. 택시 유리가 스스르 위로 오르면서 그녀와 노부인의 얼굴이 나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는 법성 면소재지 한 켠에 설치돼 있는 낡은 관광안내표지판 앞에 선다. 표지판에는 홍농, 마례, 계마,
가마미 같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지명들이 서쪽 해안선을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 지명들 중에서 유난히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곳이 있다.
‘가마미’, 법성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있는 해안가다. 나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한참을 기다렸는 데도 가마미행 버스는 오지 않는다. 이미 어두워진 법성 면소재지 약방 사거리에는 이제 사람의
흔적조차 뜸하다. 좀 전까지 휘황한 불빛을 밝혔던 굴비가게들도 하나둘 불을 끄고 어둠 속으로 쑤욱 잠수해 들어가고 있다. 약속이나 한 듯 골목
여기저기서 셔터 내려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몇몇 가게를 제외하곤 모두들 가게문을 닫아 버린다. 텅 빈 거리에 혼자 남아 낯선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방인, 나는 어깨를 웅크리고 셔터가 내려진 약방 모퉁이에 홀로 서 있다.

버스를 기다린 지 벌써 한 시간 가량이 지났다. 아마도 가마미행 버스는 이미 끊긴 모양이다. 고립감. 그
순간 나를 일깨우는 느낌은, 혼자 있다는 고립감이다. 어둠 속에서 나와 같이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서있는, 그런 고립의 흔적을 털어내기 위해 나는
불빛이 있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 하나를 막 벗어났을 때, 털털털 하는 낡은 엔진 음을 내는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앞을 스쳐
지난다. 다방 여자가 모는 오토바이다. 여자는 분홍빛 보자기에 싸인 커피식기 보퉁이를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서 능숙한 솜씨로
비좁은 골목을 파고 들어간다. 얼마 후 여자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내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이곳에서 자고 갈 것이냐고
묻는다. 내가 그럴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명함 한 장을 내민다.

나는 다방 여자가 내민 명함을 들여다 본다. 천수장 모텔. 명함에는 그렇게 씌어 있다. 나는 여자가 일러준
대로 해안가 방파제와 나란히 잇닿아 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5분여를 걷고 나자 그녀가 일러준 모텔의 불빛이 보인다. 어두운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외로운 한 점 불빛인 등대, 작은 면소재지의 밤을 멀리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모텔의 불빛은 등대처럼 내 앞에 우뚝 서서 지친 걸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게다가 반가운 그 불빛은 불쑥 찾아든 고립감마저도 잠시 잊게 해준다.

카운터에서 키를 건네 받고 내가 묵게 될 객실이 있는 3층으로 향한다. 뚜벅뚜벅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소리들이 뒤따라온다. 이윽고 뒤따라온 소리들은 하나둘 가벼운 단절음을 남기고는 곧바로 증발해 버린다. 아내의 가출 이후 모든 생활의 리듬들은 단절음을
내기 시작했다. 보름 째 학교에 연락도 없이 출강을 하지 않고 있는 데다 평소 안면이 있었던 사람들과도 일체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지금 내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 낯선 지점에 와 있다. 나는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다. 이제 아내 뿐 아니라 내 주위의 사람들이 서서히
나를 잊어가게 될 것이다. 잊는다는 것… 그것은 무척 편리한 인식이다. 계단을 따라 올라 오던 발자국 소리가 뇌리에서 사라지듯 지금껏 끈질기게
누적되어 온 오래된 기억들은 순서대로 잊혀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한 여자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질질 끌며 여기까지 걸어 왔다.
그로 인해 결국 집을 뛰쳐 나간 아내. 그런아내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 데도 나는 언제까지
‘오래된 기억의 숲’을 배회하면서 살게 될 것인지, 솔직히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숲 속에 머무르고 있고

나는 길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

 

염창권의 詩 ‘숲과 길’ 중에서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시집을 뒤적거리고 있다. 이제 잠을 자고 싶다. 시집 속의 단어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내 눈동자 위를 구르고 있다. ‘잠을 자고 싶다.’ 나는 시를 읽으면서도 이런 주문을 외우고 있다. 복도를 오가는 발자국 소리들,
똑똑똑~ 누군가 내 방문을 노크하고 있다. 분명 그 소리는 출입문 쪽에서 들리는 소리이다. 나는 시집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 놓고 소리가 나는 출입구
쪽을 응시한다. 다시 한번 노크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여섯 번이다. 그리고 침묵… 5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내 방문 앞에서 인기척이 사라진다.


 

4

“정말 불두(佛頭)앞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집니까?”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묻는다.

“네. 아주 허황된 소원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녀와 나는 굼방모탱이 비탈에 버티고 있는 허름한 당집 앞에서 불두를 바라보는 중이다. 몸통은 잘려나가고
머리통만 남은 불두는 여느 절간의 부처 모습처럼 근엄한 인상은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불두가 영험을 지니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이 불두가 왜 이곳에 모셔져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게다가 몸통은 잘려나가고 이렇게 머리부분만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근엄하기는커녕 괴기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이 불두가 왜 이 벼랑에 모셔져 있는지 궁금하게 여겨진다. 그녀는 비탈에 선 채로 불두에 관한 이야길 꺼내 놓는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이에요. ‘마라난타’ 라고 하는 인도 스님이 석불을 배에 싣고 이곳 법성 앞바다를
지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심한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고 말았대요. 그 때 스님은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기 위해 배 안의 것들을
죄다 바다에 내다버렸는데 차마 석불만은 버릴 수 없었다는군요.”

“그럼 스님은 석불과 함께 바다 속으로 잠겨 버렸습니까?”

나는 궁금해서 그렇게 묻는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젖는다.

“아니요. 나중에야 스님은 석불을 바다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스님이 석불을 지키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모두 버렸으면서도 마침내 석불마저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는 건, 결국 불심(佛心)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취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급해진 스님은 자신의 육신을 구하기 위해 불심을
버린 것일까, 나는 사뭇 그 해답이 궁금하기만 했다.

“그럼 스님은 육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佛心)를 버린 것일까요?”

“아니요. 스님이 석불을 버린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세계를 버린 건 아니에요. 스님이 생각하는 석불이란 이런
거겠죠. 이 세상에 버리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석불이란, 깨달음을 얻는 도구일 뿐 그것 자체가 부처는 아니다. 심지어 부처를 버렸다는
불안이나 죄의식까지도 모두 벗어 던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처의 세계인 공(空)인 것이다. 라구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화사하게 웃는다. 인도스님 마라난타와 그가 버린 석불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세세히
풀어 설명해 보이는 그녀에 대해, 나는 잠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그녀의 생각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어떤 힘이 담겨져 있다. 버린다는 것, 그것은 ‘버림’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버림 이후의 얻음’에 관한 생각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통해 내가 불두에 대해 알고자 했던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불두가 어떤 신령스러운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다음 이야기를 찬찬히 들으면서, 나는 착각에 빠져든다. 그녀가
낯선 사람이 아닌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낯이 익은 사람 같다는 생각...그것은 분명 착각일 텐데도 그녀의 머리칼, 입술 그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실어나르는 그녀의 채취, 그런 것들이 자꾸만 그녀를 낯익은 존재로 오인케 한다.

“저 불두는, 그 때 바다에 버려진 뒤 해안가로 밀려든 석불의 일부에요. 몸은 잘려나가고 머리만 이곳으로
밀려온 거지요. 게다가 스님보다 한발 앞서 해안가에 닿았다더군요.”

그녀와 나는 가마미로 향하는 군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낡을 대로 낡아 살갗이 너덜너덜해진 군내버스는 굼뜬
동작으로 북서쪽 해안도로로 향해간다.

나는 가마미로 향하는 그 버스 안에서, 시시때때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나의 과거 기억들에 관해 그녀에게 말했다.
향원 누나의 죽음을 목격한 그 해 여름의 기억들 혹은 그 이후의 일들에 관해서…나는 처음 만나는 낯선 여자에게 내 삶의 구석진 부분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왠지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렇군요. 당신은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향원 누나의 존재를 죽음 아닌 실체로 껴안고 살아왔군요. 실재하지
않는 그림자 같은 그녀가 당신 기억의 숲을 돌아다니는 일. 그건 바로 그녀에 대한 당신의 환상이거나 환각이겠죠. 하긴 그런 류의 환상이나 환각마저
없었더라면 당신의 삶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녀는 말을 하다가도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혹시 심리학이나 국문학을 전공하셨습니까?”

갑자기 내가 엉뚱한 질문을 던지자 그녀의 눈이 공처럼 동그래진다.

“아뇨. 전 직업이 산부인과 의사에요.”

내 예상을 깨는 대답이다. 산부인과 의사.

“실은 전 수많은 아기들의 탄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일을 하는 산부인과 의사이면서도 정작 제 자신은 단 한번도 아이를 가져보지 못한
그런 여자예요. 좀 전에 당신이 제게 말했죠. 당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다고…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세상에는 형태를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불협화음들이 여기저기 존재하는구나. 그 불협화음이 당신에게는 ‘기억’이라는 상태로 저에게는
‘불임’ 이라는 상태로 존재할 뿐, 삶의 본질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이 삶에 있어서의 ‘그림자’ 라는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자등받이에 깊숙히 몸을 기대고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두꺼운 차일같은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림자!

버스는 가파른 경사로를 온힘을 다해 기어오르느라 엔진출력을 최대로 올린다. 그르렁그르렁 힘에 부치는 듯한
격한 신음을 토하던 버스는 가까스로 험로를 오른다. 다시 내리막길이다. 젊은 버스기사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긴 한숨을 토한다.

“그랬을까요. 지금껏 향원 누나에 대한 환상이 없었더라면 제 삶은 존재하지도 않았을까요?”

나는 정말 궁금해 하는 눈으로 그녀에게 묻는다.

“분명 그랬겠죠. 하지만 반대로, 제가 만일 당신 아내의 입장이었다면 저 역시 당신의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했을 거예요.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여자의 얼굴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라면 그건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불행일 수도 있어요. 전 부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신과 함께 했던 그간의 결혼 생활이란 게, 알고 보니 그림자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을 때… 그래요.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가 일었을 거에요. 여태껏 그림자 놀이의 꼭두각시 역할을 해온 것에 대한… 어쩌면 그녀는
여태까지의 결혼 생활을 빗나간 환상으로 여기고, 그 환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집을 나간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런 제 생각이 무리인가요?”

“……”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녀 말대로 나는 의식의 가면을 쓴 채로 그림자놀이를 해왔던 것이 사실이므로…그러나
그러한 의식의 가면을 벗기 위해 내 나름대로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런 노력 역시 늘 불발로 끝나고 말았지만 ...결국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나를 더욱 그녀에게로 유인하는 반발력이 되어 되돌아오곤 했다. 나는 아무 것도 버릴 수 없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도,
향원 누나도….

더 이상 가파른 오르막길은 나타나지 않는다. 운전기사는 기어변속을 하지 않고 가끔씩 브레이크 페달을 부드럽게
밟았다 떼곤 한다. 차는 고르게 숨을 쉬면서, 바닷바람에 몸을 충분히 식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스러우리 만치 힘에 부치는 신음을 토하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랐던 버스는 이제 그 힘겨움을 잠시 잊고서 삶의 내리막길 같은 경사로를 향해 고른 숨결로 내달린다.

버스가 달리는 해안도로 주변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이제 막 태양에서 퉁겨져 나온 싱싱한 은빛
햇살들은 수면에 착 달라붙어 파도타기를 한다. 그 햇살을 찬찬이 좇아가면 춤을 추는 작은 섬들이 나타난다. 섬은 수면 위로 불끈 치솟았다가 자맥질을
하듯 푸른 숲 아래로 푹 꺼져 버린다.

“아름다운 풍경이군요.”

그녀는 굳어진 내 얼굴을 보더니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햇살이나 파도, 섬들도 사람처럼 과거나 현재, 미래에 대한 꿈들을 꿀까요?”

그녀를 향해 묻는다.

“네. 그럴 거예요. 저것들도 꿈을 꾸니까 저렇게 살아서 소리 지르고 펄쩍펄쩍 뛰는 거겠죠. 저 소리나 움직임이
기쁨을 표현한 것인지 슬픔을 나타내는 건지 그건 햇살이나 파도 그리고 바람만 아는 비밀일테구요.”

그녀는 소녀처럼 활짝 웃는다. 맞는 말 같다.

 

해안마을은 정적을 불러들인다. 몇 안 되는 손님들이 서둘러 가성봉 식당을 빠져나가고 나자 식당 안에는 그녀와
나만 남는다. 식당 바깥 공터에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내린다. 공터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다.

그 사이 바다를 도망쳐 나온 바닷바람이 출입구 쪽의 문틀을 잡고 웅웅거리고 있다. 바닷바람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자 문틀뿐 아니라 널따란 통유리까지 함께 울어댄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그녀 역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말이 없다. 바다를
도망쳐 나온 바람, 그것들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까지 와서 문틀을 마구 흔들어 대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바닷바람은.

“오늘밤은 꽤 추울 것 같네요. 방에 불을 든든히 넣어드릴 테니까 편히 쉬세요.”

수더분한 인상의 주인 여자는 커피 잔을 거둬가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우리가 부부가 아닌 타인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가에는 의심의 눈빛 같은 건 없다. 그녀의 입가에 다정한 웃음이 번진다. 그녀 말대로 오늘밤은
꽤 추울 지도 모른다. 바다를 도망쳐 나온 바람이 저토록 심하게 문을 흔들어 대고 있으니….

식당에 불이 꺼진다. 주인여자는 주방의 불을 끄고 홀 깊숙한 곳에 있는 빈방을 찾아 게으른 걸음으로 사라진다.
그녀와 나는 식당 이층에 있는 다락방으로 오른다.

주인 여자의 말대로 방안은 적당한 온기로 훈훈하게 데워져 있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듯 그녀와 나는 다락방의
어둠 속에 묻힌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 뿐 방안에서는 인기척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적.

정적을 깬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바닷가 쪽으로 난 작은 창문을 연다. 창문이 열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제법 차가운 바닷바람이 움직인다. 그 바람은 이층 다락방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해송의 매끈한 몸피를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이내 뾰족한 이파리들
속을 파고든다. 그리곤 창문을 훌쩍 건너뛰어 몰래 방안으로 기어든다.

그녀와 나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창에 기대어 바닷가 쪽을 바라다보고 있다. 잿빛 어둠 속에서 바다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파도는 제 동료들을 에둘러 우르르 해안가를 향해 달려 나간다. 집 아닌 곳을 향해 그것들은 한사코 달려 나간다. 얼마 후 제 몸이
가 닿는 곳이 미지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집’ 이나 ‘어제의 길’이란 것을 그것들은 알아챈다. 실망의 눈빛!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파도의 발걸음엔
힘이 없다. 밤새도록 길을 잃고 방황하는 파도의 불안한 발걸음.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손이 나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주전자에서 흘러내린 따스한 물줄기가 목을 타고 몸 깊숙한
곳까지 흘러드는 느낌. 그녀의 부드러운 손은 나의 목 귀퉁이를 돌아 가슴으로 흘러내린다. 파도처럼 하얀 빛깔을 닮은 그녀의 손길, 부드러우면서
망설임 없는 그녀의 손길이 뚜벅뚜벅 나의 몸을 향해 걸어 들어온다.

나는 공처럼 둥그렇게 말린 그녀의 등을 본다. 가슴에 커다란 공이나 풍선 같은 걸 안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무릎을 곧추 세우고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고 있다. 반대편 그녀의 등허리 쪽에서 나는 그녀를 안는다.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녀의 허리가 움찔 놀란다. 여린 초승달 빛이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 그녀와 나를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그 여린 달빛마저도
해송 숲 그림자 뒤로 달아나 버린다.

그녀는 몸을 편다. 웅크렸던 몸이 열리자 비로소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 온다. 사람의 숨결… 나는 그녀를 안아
따뜻한 바닥에 눕힌다. 그녀는 바다의 품에 안긴 파도가 되어 아늑한 숨을 쉰다. 그녀, 쏴아 쏴아 몸을 흔드는 파도가 되어 숨을 쉰다.

“미안해요. 일부러 당신을 유혹하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은 아니에요. 아까 말한 대로 전 결혼한 지
5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어요. 문제는 남편 쪽에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요. 남편은 지금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나는 그녀를 품안에 깊숙이 껴안는다. 고동치는 그녀의 숨소리는 나의 심장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나의 검지 손가락을 세로로 가만히 가져다 댄다. 잠깐 동안의 침묵. 그녀와 나는 말이 없다.

“이리로 오는 차안에서 당신이 삶의 불협화음에 대해 말했었죠?”

내가 묻는다.

“그랬죠. 당신의 오래된 기억에 관해… 그림자 같다구.”

“ 그림자 혹은 삶의 불협화음 하나가 어쩌면 조만간 사라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요, 당신?”

“그건 지켜 볼 일이죠.”

그녀는 파도처럼 나를 향해 달려든다. 찰랑찰랑 그녀의 긴 머리칼이 나의 목선을 부드럽게 간지럽히고 이윽고
그녀의 숨소리는 나의 배꼽 가까운 데에서 소곤소곤 속삭인다. 아아아~ 그녀는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비명을 내지른다.

스걱스걱. 그녀의 살갗과 나의 살갗이 부딪치면서 노젓는 소리가 들린다. 물결은 점점 거칠어지고 그녀와 나의
입 언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소리도 점점 뜨거워진다. 바람이 분다. 세상을 뒤집어 버릴 것 같은, 불안의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이 분다. 스님은
노를 젓다 말고 바다를 본다. 여인은 남자의 뿌리가 밀고 들어오는 자궁의 뜨락을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다본다. “얘야, 이제사 말하는 건데, 실은
나 역시 새애기 때 아이를 갖지 못해 근 십년을 죄인처럼 살았다. 결국 법성포 굼방모탱이에 있는 불두에 가서 소원을 빌고 아이를 가졌다. 그게
바로 네 남편이다.” 시어머니가 말했다, 굼방모탱이 불두에 가서 소원을 빌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노라고… 그녀는 그렇게 내게 말한다.

그녀는 이제 버려야 할 것을 정한 모양이다. 스님 마라난타가 풍랑 속에서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석불을 불끈 들어 바닷속에 처넣는 순간처럼, 그녀는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본다. 어둠 속에서 생기 있게 빛나는 그녀의 눈.
그녀의 눈이 간절한 빛으로 나를 바라다본다. 나는 푸른 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을 향해 온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그녀가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나도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팽팽하게 곤두선 나의 신경들이 일시에 그녀의 자궁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든다. 순간 그녀의 바다는 풍랑에 휘감겨 일시에 뒤집힌다. 허억! 단 한번의 비명이 들리고 바다는 숨을 죽인다.

 

“잊어버리세요. 아니, 지워버리세요. 향원 누나에 대한 기억… 저 역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당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울 거예요. 이 밤 이후에 제 뇌리에 남는 것이라곤 ‘배란기와 불두의 영험’ 같은 것들이겠죠. 오늘밤과 당신에 대한 기억은 애써
지우지 않더래도, 저 파도가 모래사장에 썼다가 지우는 말들처럼 곧 제 기억에서 씻겨나가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저희 시어머니께서 남편에 대한 출생의
비밀을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계시려다가 저에게 그 비밀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어쩌면 삶은 실재와 그림자를 모두 갖고 있는 그런 것인지도
몰라요. 전 제 삶을 견디어 낼 거예요. 어머니처럼요. 당신도 더 이상 고통스러운 길을 만들지 마세요. 저는 현대의학의 힘을 믿는 산부인과의사이면서도
불두의 영험을 믿는,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또한 부정하지 않아요. 저도, 어머니처럼 불두의 힘을 믿어요.”

그녀는 밝게 웃어 보인다. 슬픔을 누그러뜨린 밝은 웃음. 그러나 나는 알 수 있다. 그녀의 웃음 뒤에 펼쳐져
있는 삶의 비명소리. 그 비명소리 혹은 웃음은, 그녀가 결혼생활 5년 동안 껴안고 살아온 어두운 그림자 같은 지독한 슬픔일 수도 있거니와 지금껏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임신에 대한 가슴 설레는 희망일 수도 있다는 것을…복잡한 씨줄과 날줄로 교직된 감정의 실타래를, 그녀는 결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손으로 풀어 보이고 있다.

 

5

굼방모탱이 당산 나무 아래.

원당제(元堂祭)가 펼쳐진다. 불두가 모셔져 있는 굼방모탱이 당산 주위로는 제를 올리는 마을 사람들이 타원형으로
우르르 몰려 있다. 이들 속에 뒤섞여 있는 낯선 외지인들 몇몇. 그 낯선 외지인들 속에서 나는 그녀를 발견한다. 어느새 그녀 곁에 돌아와 있는
그녀의 시어머니. 나의 집요한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는 며느리의 시선을 딴 데로 두게 하고 주위 사람들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치성을 드린다.
제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녀의 시어머니는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다. 이틀 전 차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 손수건을 건네 받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낯설게 하기. 어쩌면 그녀는 나를 모르는 낯선 여자일지 모른다. 나 역시 그녀를 모른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더더욱… 낯선 이들은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입을 다물고 그렇게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난 낯선 여자예요.’

 

띠배. 그녀!

오색 기가 그녀의 몸을 휘감고 그녀를 바다로 데려간다. 푸른색, 빨강색, 노랑색, 하늘색, 흰색 깃발이 그녀의
몸을 칭칭 휘감고 심해로 향해간다. 그녀는 온몸에 바람을 묻히고 허수아비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이 없다. 굳어진 그녀의 몸에 누군가 불을 붙인다.
바람과 불길은 그녀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 놓고 가슴 앞섶을 풀어헤친다. 그녀는 점점 뜨거워지는 몸을 바람과 불에 맡기고 웃는 낯으로 가래질소리를
따라 부른다.

 

어낭청 가래야

이 가래는 뉘 가랜가

김첨지네 가래라네

어낭청 가래야

황금 같은 내 조기야

어디 갔다 인제 왔나

어낭청 가래야

 

나는 내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녀가 지나는 길에는 하얀 물길이 열린다.
열여섯, 그 해 여름 용바위 모래사장에 숨죽인 채 곱게곱게 누워 있던 하얀 향원 누나의 모습. 이른 봄날의 백목련 꽃같은 순백의 생명 하나가 화장되던
날, 내 마음속에는 ‘하얀 꽃’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그 꽃이 지금 불길이 되어 바다를 환하게 밝힌다. 그녀는 바다에 붉은 피를 토한다. 붉은
피가 번진 바다. 그녀는 바다에 붉은 피를 토하고 잿빛 그림자를 남긴다. 바람은 마지막 남은 그녀의 흔적인, 그 잿빛 그림자를 거두어 심해 쪽으로
향한다.

누군가 나의 등을 툭 건드린다. 코에 익은 화장수 냄새! 나는 그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든다. 처음 그녀에게
내밀었던 모양대로 반듯하고, 정갈하게 개어진 손수건. 하얀 꽃으로 피어 오랜 시간 내 기억에 머물렀던 그녀는 바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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