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 테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나 이 테 /박영란

 

트럭은 벌목한 나무를 가득 실어가고 있었다. 일방통행로 같은 외길에서 우리가 탄 버스는 트럭 꽁무니를 천천히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트럭의 꽁무니라고 하지만, 정작
트럭은 보이지않고 길게 드러누운 나무들만 보였다. 버스 앞 유리창에는 누워서 가는 나무들의 나이테가 빙빙 돌아가고 있었고,  그 위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원을 그려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로수와 잿빛 하늘 그리고 나이테와 빗방울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뿌리와 가지를 다 처버린 나무둥치는 아무 말이 없다. 둥지를 틀고 살았던 새소리도, 바람에 이는 나뭇잎 소리도 함께 사라졌나 보다. 나무는 해와 달, 바람과 구름, 그리고 비와
눈 그들과도 영원한 이별이다. 그래서인지 나무는 될대로 되라는 듯 길다랗게 누워버렸다.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여인의 아픔처럼, 나무가 잘린 생살에서는
허연 소름이 돋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었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자기 표현이었다.

‘나이테’ ! 이제 저 나이테는
나무의 신분증이 되는지도 모른다. 갈색의 치밀하고 선명한 무늬는 나무의 태생과 연륜과 성질을 보여주는 역사가 되는 셈이다. 원산지는 추운 지방이었고,
세월을 보낸 나이는 몇 살이며, 곧고 단단한 아름다운 나무였다고 크고 작은 동심원들은 그렇게 메아리치며 고향 백두산을 떠나고 있었다. 나무위로
유리창으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은 나무의 슬픔처럼 보였다.

나이테를 보다 문득 나는 나의 여권에 찍힌 지문을 확인했다. 목줄에 걸려있는 가방을 열어 여권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여행을 하는 동안 거의 익숙한 동작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여행은
잠시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숨통이라 생각했거늘, 그러면서도 정작 이 얄팍한 종이 한 장에 노심초사하며 다니는 꼴이었다. 나이테처럼 여권의 지문은
내가 달고 다니는 끈이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어딜가나 예기치 않는 상황에서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나의 얼굴도 나의 생각도 행동도 아니다. 사진과 생년월일 그리고 주소와 지문이 찍혀있는 주민등록증이 자신을
대변한다. 주민등록증에 박혀있는 사진과 숫자보다는 그래도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을 주는 것은 지문이다. 나무의 모든 흔적을 나이테가 품고 있듯,
사람의 지문에도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일까. 손을 펴보니 손은 나무의 뿌리같기도 하였고, 또 나무의 가지같기도 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기꺼운 마음에 엄지손가락을 눈 앞 가까이 대고 들여다 보니, 지문은 나이테와도 닮아있었다. 파상의 무늬, 파동의 소리, 파장의 밀도가 아우성치듯
눈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알 수 없다. 과학이 인간의 염색체를 해독하고 생명의 신비를 밝혀내고 있지만 지문만큼은 완전한 신의 영역이지 않을까.

일본은 유독 재일동포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했다. 그들에게 지문은 민족이라는 끊을 수 없는 각인인 동시에 ‘조센징’으로 차별과 감시의 대상으로 구별되는 하나의 낙인이지 않았을까.
쇠로 된 불도장을 달구어 몸에 찍어두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낙인이라고 하듯, 낙인이라는 말 속에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씻을 수 없는 불명예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눈으로 생각으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주홍글씨'의 헤스터는 부정한 여인이고 대한민국은
IMF국가라고. 그렇게 찍어버린 낙인은 도장의 위력보다 더 확실하고 오래간다. 일생동안 가슴에 달고 살아야 했던 '주홍글씨'는 그 어떤 형벌보다
더 아픈 도덕적 낙인이지 않았을까. 차라리 활활 타오르는 불은 재가 되어 남지만, 낙인은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는다.

 ‘뿌리’의 작가 앨릭스 헤일리는 다섯살 생일때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는다. 수령 200년을 알리는 나이테를 가진 거목 한 조각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이테를 가리키며‘ 얘야, 여기는 노예해방이 선언된 해이고, 요쪽은
너희 부모가 다닌 레인대학이 설립된 해란다. 그리고 너가 태어난 해는 껍질 바로 안쪽 여기란다’라며 앨릭스 헤일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나무조각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가계를 9년동안 추적해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쿤타 킨테의 6대에 걸친
모계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전세계를 사로잡았다. 그리고보면 그는 자신의 뿌리를 나무의 나이테에서 찾았다. 나이테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표였던 것이다. 지문처럼 그에게는 운명이었고 희망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이테는 후천적이고, 지문은 선천적이라고 하겠다. 전자가 한겹 한겹 세월의 때를 늘려갔다면, 후자는 태어남과 더불어 가지고 나오는 업의 고리인지
모른다.

나에게도 나이테가 보인다.
거울에 비치는 눈가의 잔주름과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나이가 그것이다. 어쩌면 사람의 얼굴은 나이와 더불어 살아온 세월과 연륜의 흔적이 만들어
놓은 나이테인지 모른다. 은은한 나무내음처럼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바로 그 사람의 지문인 셈이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또 다른 업의 고리가 아닐까.

나의 얼굴은 어떤 자기증명을 할 수 있을까. 기왕이면 아름답고 섬세한 목리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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