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전북기독교사>










<신년특집-전북기독교사>

 

역사는
흐른다. 흐르는 역사는 자칫 망각의 강을 이룬다. 그러나 그 흘러내린 흔적은 오늘날 우리 곁에 생생히 남아 ‘들을
귀 있는 자’들을 향해 어제를 이야기하고 오늘을 증언하며 내일의 전망을 가능케 한다.

이 땅에
첫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도 어언 1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한국교회는 이 기간동안 5만 교회와 1천만 성도를
자랑하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교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질적인 발전을 꾀하며 소망이 가득한 21세기를 위해 제2의 성장을 꿈꾸고 있다.
희망찬 미래는 과거를 철저히 분석해 오늘에 적용하고 내일을 준비하는데서 얻어진다.

이제는
전북의 교회들이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올라 흔적의 현장들을 되돌아 볼 때다. 주님은 에베소서교회를 향해 첫사랑을 기억하라고
가르쳤다. 전북 교회들이 선조들의 신앙을 발판 삼아 정진할 때 한국교회 부흥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한국 전래와 특징

지금부터 110년 전인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위해 ‘7인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한다.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전킨(전위렴), 레이놀즈(이눌서) 등 3명의 남선교사와 매티 테이트, 볼링, 매리 레이번, 린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선교사가 주인공.
역사는 이들을 ‘7인의 선발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서울에 도착해 한국어를 익히며 전라도를 선교구역으로 할당 받아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 선교부(Station)를
설치하고 선교를 시작했다. 당시 선교는 복음선교 뿐 아니라 병원선교와 학교선교가 함께 이뤄졌다.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신도의 자녀는 교육을 시켜 사회와 교회의 지도자로 삼는다는 것이 당시 선교사들의 선교방침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고 의지할 데 없는 한국인들에게 이들의 봉사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양문화는 이 때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호남지역 미션로드 전주

신앙적으로
전주는 호남지역 미션로드의 출발점이었다. 전주를 시발지로 호남지역에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890년대 초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893년 6월에 레이놀즈선교사의 어학교사면서 조사(전도사)였던 정해원을 전주에
파송했다. 그는 전주성문 밖 은송리에 미화 26달러를 지불해 초가 한 채를 매입, 예배를 드렸다. 호남 최초의 교회인 전주서문교회의 시작이다.
석달 후 남장로회 선교부의 테이트와 전킨 선교사가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전주에 내려와 활발한 전도활동을 벌였다. 전주서문교회의 창립은 당시 유교와
토속종교에 사로잡혀 복음에 암울했던 호남지방의 선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후 드류와 레이놀즈선교사가 전주와 군산 등지를 돌면서 선교활동을
전개, 호남선교는 본격적인 기지개를 펼 수 있었다.

이듬해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으로 잠시 주춤했던 전주지역의 선교는 이후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다시 궤도에 진입해
1897년 김창국이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는 등 활발하게 전개됐다. 서문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전주지역에 신자들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 서문교회는
전주와 호남지역의 모교회로 많은 교회를 분립시켰다. 전주지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남문교회와 완산 전주중앙 등 지금 전주지역의 굵직한 교회들은
모두 서문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제하
전주서문교회는 계몽운동을 펼치며 민중들의 교육에 힘썼고 독립운동에도 깊숙하게 관여했다.3·1운동 당시 호남지역의
만세운동을 인도했던 김인전 목사나 20년대 활발한 주일학교운동을 벌였던 배은희 목사가 모두 전주서문교회출신이다.

 

#항만선교지 군산

호남
들녘에서 생산되는 지방 토산물을 서울로 운반해 가는 포구였던 군산에 처음 온 선교사는 레이놀즈 선교사와 드루 의사 일행이었다. 이들은 1894년 3월 3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전라도 각지를 답사하기 위해 선편으로 군산항에 도착, 하루 동안
전도활동을 하고 다음날 전주로 갔다.

이후
선교부는 1895년 3월 전킨 선교사와 드루 의사를 군산에 파견한다. 이들 두 사람은 제물포를 출발한 지 11일
만에 군산에 도착, 1개월 동안만 선교활동을 펼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전라도가 어수선해 선교부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혼란이
진정된 1896년 2월 전킨과 드루는 다시 군산에 돌아와 금동에 두 채의 집을 사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들어간다.
드루는 자기 집 사랑채에 진료소를 열고 환자들을 진찰하기 시작했고, 전킨은 진료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주일에는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 이 곳이 바로 군산 최초의 교회인 군산교회(1898년 없어짐)다.  당시 김봉래와 송영도가 세례를 요청, 1896년 7월 20일 전킨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식이 열린다. 전라도 최초의
세례교인이 탄생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 4일에는 송영도의 어린 딸이 세례를 받아 전라도 최초의 유아세례로 기록됐다.

군산선교부가
있는 궁말(구암리)에서 왕성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던 전킨은 신도수가 늘어남에 따라 구암리 산등성이에 예배당을 짓고
1899년 12월 4일 주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구암리교회의 시초다. 구암리교회는 군산교회가 98년 없어짐에 따라
실질적인 익산지역의 최초의 교회로 기록되고 있다.

구암교회는
날이 갈수록 신자가 늘어 수 백 명에 이르렀다. 전킨은 지경, 만자산, 김제 송지동과 성말까지 가서 순회 전도를
하며 기도 처소를 세웠고, 드루 의사는 교인들을 데리고 서해 고군산 섬과 오식도 등 섬을 돌아다니며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다.

이후
불과 앨비 선교사가 군산 선교에 합세했고, 이들은 군산과 옥구 지방은 물론 금만경 평야지대와 금강 건너 충남 지역까지
선교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복음의 요충지 익산

신앙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익산시는 전체 인구 가운데 30%가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많은 것은
일찍부터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오래전부터 전라선과 호남선이 통과, 교통의 요지여서 복음의 수용성이
강한 외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익산지역
최초의 교회는 전킨이 군산선교 개시 이후 세 번째로 설립한 오산면의 남전교회다. 일부에서는 함라교회라는 주장도 있으나
남전교회는 군산이 개항되던 1898년에 세워졌다. 당시 전주선교부를 개척한 남장로회의 전킨 선교사가 호남선교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오산면에 복음이
들어갔다는 주장이다. 남전교회 당회록과 교회록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후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힘입어 교회가 계속 설립됐다. 1903년 오상운 등이 설립한 고내리교회를 비롯
1905년 동련교회, 선리교회, 1906년 웅포교회, 고현리교회, 송산리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익산지역 복음화를 위해 들어섰으며 차츰 복음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특히
익산 모현동에 있는 고현교회는 1906년 오원집이라는 청년이 전위렴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설립한 교회로 초기 익산지역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의료선교와 근대학교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병원과 학교는 1885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기틀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병원과 학교로 시작된 기독교의 간접 선교방식은 주효했다. 의료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서양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근대 교육시설로 모였다.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전북에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1년. 당시 전주 선교부는 학교설립이라는 역사적인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이 결정에
따라 1901년 전북 최초의 학교인 신흥학교가 전주에 설립된데 이어 1902년에 전주에 기전여학교가, 군산에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가 각각 설립됐다.

한국의
의료선교는 군산 선교부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 1896년 전킨과 함께 서울에서 군산으로 내려온 드루 의사는 활발하게
의료선교를 펼쳐 당시 드루의 집에는 치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의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이어 전주에서 해리슨과 잉골드 등이 의료선교를 이어갔다.
의료선교는 전주 예수병원과 군산병원 등이 설립되면서 체계적이고 본격화 됐다.

/박경원기자 d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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