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역서화징에 기록된 벽하 조주승










근역서화징에 기록된 벽하 조주승

근역서화징에 나오는 벽하 조주승

석정의 제자 중 가장 알려진 인물로는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1854-1903)을 들 수 있다. 벽하의 비조는 고려 대장 벽성군 증(贈) 좌정승 연벽(連璧)이다.
벽성(碧城)은 사실 김제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벽성(김제)과  여러 이웃 고을에 널리 이주하여 살았다. 증조부인 필록과 조부인 동현은
모두 벼슬을 하였으며, 부친 하섭은 승훈랑을 하면서 일을 잘 처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벽하는 어려서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그의 부친이 수많은 종이를 사서 그에게 글씨를 쓰도록 하였다. 장성해서는 서예를 더욱 좋아하여 항상 임서(臨書:필첩을
보고 형태를 모방하는 것)를 하느라 거의 침식을 거를 정도였다. 부친은 벽하가 병이 들어 집안 일을 보살피는 데 방해될까 염려하여 두 차례나 벼루를
불태웠지만, 끝내 글씨 공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벽하는 대체로 30~40년 동안 해서와 행서의 임서 공부를 하였는데, 주로 왕대령의 ‘낙신부’와 안노공의 ‘가묘비’에서 더욱 그 절묘한
경지를 얻었다. 공은 일찍부터 석정 이정직에게 사사 받았지만 그 조예와 윤색(潤色)에 있어서는 스승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벽하가 운명하자 평소에 알고 지내던 매천(梅泉) 황현(黃玹:1885-1910)은 ‘곡조벽하(哭趙碧下)’라는 시를 지었는데, 명필들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읊조리고
있다.

“송송재후이창암, 정족참차벽하삼, 논정천추동필원, 미응적막아호남(宋松齋後李蒼巖, 鼎足參差碧下三, 論定千秋東筆苑, 未應寂寞我湖南: 송재 송일중과
후의 창암 이삼만, 벽하 조주승이 끼어 정족을 이루며, 천년 조선의 서단을 논정하니, 우리 호남의 서단은 적막하지 않네.)”라고 하였다. 즉 황현은
송일중과 이창암을 조선의 국필로 인정하였고, 조벽하가 뒤를 이어 호남의 서맥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작품으로는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과 전주 ‘추천대’, 남고산성의 ‘관성묘’, 지리산 실상사의 ‘백장암’ 현액 등이 있다. 특히 이상한 일은
‘관성묘’ 편액을 쓰고 관우가 나타나 데려간다는 현몽 3일 만인 고종 계묘(1903) 6월 14일(50세)에 인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벽하가 일찍
죽었는데 좀 더 살았다면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묘소는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옥녀봉 아래 갑좌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벽하의 아들 심농 조기석은 원래 김제에
살았는데, 일제시대에 창씨개명과 일본인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 완주군 구이면 와동 마을로 이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여기서 조기석은 벽하의 서법과 화법을 계승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묵죽에 뛰어난 벽하

벽하는 석정에게 10년 동안 문(文),시(詩),서(書),난(蘭),죽(竹)을 그리는 법과, 시조,거문고 등 일곱 가지 예능을 수련하였다. 즉
벽하는 해서와 행서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으며, 사군자의 기본도 충실히 연마했다. 또 진(晉),당(唐),송(宋) 및 여러 시대의 글씨를 보고 한
점 한 획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사군자 또한 그 기본기를 충실히 하여 명성을 떨쳤다. 특히 대나무를 그리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 자하 신위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간의 평이 있었다. 시창(詩唱)과 탄금(彈琴)에 있어서도 악공(樂工)에 비견할 만큼 놀라운 경지에 들었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의 예능을 사절(四節)이라 칭했다.

석정의 제자 중에서 대나무로 뛰어난 사람으로
벽하와 유제 송기면을 들 수 있다. 유재의 대나무도 나름대로 특색이 있지만 벽하의 대나무는 필획이 거칠어서 마치
바람결에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 있다.

대원군이 벽하의 난과 대를 보고 ‘창난벽죽(倉蘭碧竹)’이라 칭송한 것을 보면 그의 솜씨가 매우 뛰어났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위창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평하기를 “벽하는 글씨 공부한지 삼십여 년에 글자는 안노공(안진경:중국 중당때의 사람으로 충신임)을 배웠고 또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호평하였다.


대나무를 잘 그리려면 수많은 세월동안 공부하여야
하지만, 벽하는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틈만 나면 산천을 유람하였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중국의 북경과 남경에서 3년을 유람하는 동안 이름난 학자들과 어울리고, 글씨와 그림의 대가들과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중국 답사기간에 가지고
온 귀중한 서화와 자료는, 본인과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갑오동란으로 완산 청석교에 살 때 병화(兵火)를
입어 집이 완전 소실되었다. 어쨌든 벽하는 중국 답사와 석정의 가르침이 글씨와 그림을 그리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어, 나중에는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특히 글씨를 쓸 때나 화제(畵題)를 쓸 때는 남의 글을 쓰지 않고 본인이 지은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육당 최남선이 조기석의 집에서 벽하를 평함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1925년 봄(삼월 하순부터 약 50여 일간의 순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리산 순례를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마한과 백제인의 정신적 지주인 모악산으로 미륵산을 거쳐 덕진 연못과 오목대, 남고산성, 한벽루, 완산칠봉을 지난다. 이 순례길에는
영호당(映湖堂) 석전(石顚) 대사가 동행하는데, 아마도 이 둘 사이는 한쪽이 스님이지만 죽마고우 이상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진 대사는 벽하 아들인 심농 조기석의
옛 친구일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맑은 선비이기 때문에, 모악산을 가는데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구이면 와동을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둘은 조기석 집에 당도하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조기석이 벽하의 대나무 그림을 보이자, 육당이 말하기를 “석정은
괴석도가 벽하는 묵죽도가 뛰어나다(石石碧竹)”라고 평하였다.

육당은 조기석의 집에서 벽하의 많은 글씨와
그림을 보았으며, 특히 벽하가 임서한 ‘난정서’ ‘낙신부’ ‘안씨가묘비’ 등을 보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광화문 편액을 쓴 향수(香壽) 정학교(丁學敎)가 벽하의 구양순(초당의 서예가) 임서첩을 보고 제발을 붙였는데, 이것을 본 육당은 향수 정학교의
발문을 보고 굉장히 반가워했다. 이 작품에 적힌 정학교의 발문을 적어본다.

“구양순의 이 글씨는 명나라 때 외국사신이
바다의 풍파와 용을 달래기 위해 청한 것인데, 오늘날 벽하의 임서 법첩 또한 외국사신이 청한 것에 버금갈 만하다”고
극찬한다. 즉 정학교는 자신도 구양순 임서를 잘 하였지만, 벽하의 글씨도 대단하다고 한 것이다.

이 때 육당은 조기석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가학(家學)을 잘 계승했다고 반가워하였으며, 아마도 덕진 연못에 있는 ‘취향정(醉香亭)’편액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옛 고구려의 고승인 보덕국사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절을 창건했다는 경복사지가 있는 마을이 구이면 행원마을이다. 행원마을 입구에
육모정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연안이씨들이 많이 기거한 곳으로 아담한 호수와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 곳의 ‘영명정(迎明亭)’ 편액도 조기석이
썼다. 이 글씨는 아담하면서도 주변의 경관과 아주 잘 어울린다.

 

사진설명

금석문 1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전주교육대학교 뒤쪽에 있는 ‘관성묘’에 있는 편액으로 벽하가 말년에 쓴 것이다.

금석문
2

전주시 팔복동 ‘추천대’ 편액은 벽하의 행서로써 낙관이 있다.

금석문
3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옥녀봉 밑에 있는 벽하의 묘비이다. 글은 작촌 조병희가 짓고 글씨는
손자인 조영문이 썼다. 이 곳은 구이 저수지와 모악산 정상이 훤히 보이는 곳이다.

금석문
4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에 있는 ‘호서제일가람’의 글씨는 벽하가 중년에 쓴 글씨이다.

금석문
5

완주군 구이면 행원마을 입구에 있는 육모정 편액이다. 이 글씨는 벽하의 아들인 조기석이
썼다.

금석문
6

전주시 덕진연못에 있는 ‘취향정’ 편액은 심농 조기석이 연꽃 향기에 취해서 휘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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