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실을 찾아서 1 – 수채화가 김세견씨










창작실을 찾아서 1 – 수채화가 김세견씨

계미년 새해가 밝았다. 예술가들은 어떤 소망으로 한해를 준비하고 있을까? 창작에
여념이 없는 작가들의 작업실을 찾아 지난해의 소회와 앞으로의 비전을 들어본다.

 

눈보라가 맹위를 떨치던 4일 오후 5시경, 이런 날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일이란 조금은 심란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리 해둔 약속 탓에 추위를 무릅쓰고
전주 덕진공원 근처에 있는 ‘김세견 수채화연구실’을 찾았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몇 번 올라서자 70여평의 넓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비어있는 공간이 다소 의외다. 연구실 구석에 있는 ‘김세견의 수채화 이야기’라는 간판이
그의 존재를 알려줬다.

수채화가 김세견(52). 그는 도내에서 유일한 수채화 전문작가다. 전국적인 수채화가 협회가 탄생한 것도 그의 노력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그도 원래 대학시절에는 유화를 전공했다. 졸업 후 그림을 떠나 한동안 사업가로 나선 것이 수채화와의 인연을 만든 셈이다.

“사업가로 성공은 했지만,
그림과의 만남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0여년만에 다시 붓을 들었는데, 이젠 동료들과의 격차가 문제였어요. 함께 교문을 나섰던 친구들이
거의 ‘하나님’수준에 도달해 있더라구요.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미친 것이 수채화였어요. 대학시절 공모전에서 수상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으니까요. 길을 찾고 나니까 그때부터는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수채화와의 인연의 시작이지요.”

이런 그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마련한 것은 1993년. 다시 그림을 시작한지 6년만의 일로, 당시만해도 매우 드문 경우여서 각계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수채화가 ‘마이너 리그’에 속한다며 안타까워 한다. 대학에도 전공과가 개설돼 있지 않을 뿐더러 사회교육원이나 문화의 집에서 취급하고
있는 정도라는 것. 이 모임의 탄생마저 그의 역할이 컸지만 역시 프로 작가들의 참여가 적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수채화를 전문적으로 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작가들부터 수채화를 독립장르로 취급하지 않거든요. 거기다 대학에도 과정이 개설돼 있지
않구요. 아직까지도 수채화는 철저하게 혼자 할 수밖에 없는 분야지요.”

수채화가 컴퓨터 만큼의 정확한 계산이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하는 김세견씨. 그는 우리나라도 외국의 경우처럼 전문성을 인정해주는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씨의 수채화는 이미 어느정도 경지에 올라있다. 안료 황토나 지점토 먹 등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묵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해 한국적인 색채도 뚜렷하다.

최근들어 그가 주목하는 것은 ‘선(禪). 색종이를 흩뿌리는 형태를 변형한 ‘축제’ 이미지도 그의 중요한 주제다.

올 2월
‘아시아 수채화 연맹전’을 통해 전주에서도 수채화의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김씨. 그는 올해도 여전히 J.M 보헨스키의 지적처럼
‘살아내지 못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헛된 짓거리’라는 고집으로 화두(畵頭)를 던지고 있다.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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