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열며>










<창문을 열며>

눈 내린 날에는……

몇년만에 푸짐한 서설이 내렸다. 모처럼 회색도시가 하얀 솜이불로 덮힌 듯하다.
눈 내린 날, 이맘때쯤 되면 그리운 어린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벌써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필자로서는 시골의 겨울풍경이 한폭의 동양화처럼 아련히
떠오르면서 세월의 많은 변화와 진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TV앞에 앉거나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디지털세대는 시골의 운치있고 적막한
겨울 정취를 느껴보지 못하고 성장하고 있어 안타깝다. 필자가 성장한 60년대는 왜 그리 눈이 많이 내렸는지 한번 내렸다 하면 며칠간 폭설이요 추위도
매서웠다. 그 당시 시골의 헛간에는 겨울내내 아궁이를 지필 땔감나무들로 가득 찼지만, 이렇게 폭설이 내린 추운 날씨가 계속되면 한두 다발씩 부엌
아궁이로 들어가는 나무를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서게 된다. 보다못해 푹푹 빠지는 눈속을 걸어서 인근 야산에서 나무를 한짐 메고 헛간에 채워 두어야
안심이 된다.

이른 아침, 땔감나무로 가득찬 헛간이나 짚가리 속에서 암탉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눈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헛간을 살펴보면, 하얗고 연한 살색의 달걀이 몇 개 보인다.

따뜻한 촉감을 지닌 달걀을 만져보며 밀대 모자속에 주워 담아 짚으로 엮은 달걀주머니로 이웃에 선물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얀눈 내린 날, 마을 앞 논가운데 얕게 얼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것이 별미이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산하를 바라보며 잘라 낸 벼포기 사이를 스쳐가는 맛이란 시골아이들 아니면 느껴볼 수 없는 재미다.

아침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얼음위를 지치다 보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거친 숨소리로 입김이 뿌옇게 피어
오른다. 하얀 솜털로 덮힌 나무사이로 밝은 해가 떠오르면서 아침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 된다. 고구마 섞은 검은
보리밥을 볼 때마다 혓바닥은 껄끄럽고 목이 말라온다. 그래도 가을내내 힘들어 만든 곡식이기 때문에 맛있게 먹어야 한다. 안채옆 사랑방에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네 어른들이 한두명씩 모여 든다. 동네 어귀에서부터 묻혀온 눈덩이를 토방에 툴툴 털어버리면 싸리빗자루로 쓸어내는 일은 내 몫이다. 사랑방에
모인 어른들은 윷놀이를 한다거나 민화투를 치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간혹 가마니를 엮어가는 일에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방바닥 돛자리 밑에 넣어 말린
호박씨를 까먹으며 어른들의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한번은, 얄팍한 하얀종이 위에 담배를 말아 혀끝으로 침을 묻혀가며 피우시건 모습이
신기하여, 친구들끼리 뒷동산에 올라가 햇볕에 말린 배추잎과 무우잎을 손바닥으로 비벼 부드럽게 만든 후, 하얀종이위에 돌돌 말아 맛을 보던 그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잘못하여 뒷동산을 태운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하얀눈이 온 대지를 덮힌때면 으례껏 어린시절의 추억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초가집
위에 두껍게 덮힌 눈들이 한낮의 태양볕에 녹아 내리면서 만들어진 고드름으로 칼싸움을 하기도 하며, 해질녘 오후에는 오전에 녹아버린 얼음을 재생시키기
위하여 논가운데 물을 다시 대어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 설날도 얼마남지 않았다. 이 사이에는 설날을 준비하느라 온 동네가 떠들썩하다.
눈쌓인 하얀마당 가운데 장작불을 피워가며 콩을 삶아 갈아서 두부를 만들어야 하고, 자루속의 비지를 찌개로 만들어 먹으면 그것 또한 일품이다. 두부속에서
나온 따끈한 물에 손발을 담궈놓고 있으며 손발때가 다불어터서 잘도 벗겨진다. 세제가 없었던 때였다.

한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또 다늘 새해를 나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주어진 일년을 후회없이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바쁜 관계로 못해본 것도 해보고 싶고, 잊혀진 예친구들을 찾아가 따뜻한 장작불 옆에서 막걸리 한잔에
고추, 된장 찍어 먹으며 옛 얘기를 나누고 싶다./건축사·우석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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