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신용설을 주장한 유재 송기면(상)










구체신용설을 주장한 유재 송기면(상)

 

유재의 생애

전북의 서맥이 굳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은
석정의 영향이 지대하였기 때문이고,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는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1882-1956)을
들 수 있다. 유재는 석정의 문하에서 학문적 바탕과 서화의 진수를 터득하였고, 그것을 그의 자제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 많은 서화가를 배출하였다.
이것은 한국과 전북 서화계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유재는 학자로서 글과 글씨를 가르침에 교수법이
남달랐는데, 가장 먼저 ‘소학’정신에 입각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명분 또한 
중시하였다. 그래서 유재의 학문과 서화의 맥은 장자인 소정 송수용과 계자인 강암 송성용 및 장손인 아산 송하영에 이어졌고, 또 국회부의장을 했던
운재 윤제술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즉 유재의 필법을 이어받은 자손과 제자들이 한국과 전북의 서단을 이끄는데 아주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유재 송기면에 대한 생애를 살펴보자. 유재의 고조인 진채는 통훈대부 사복사정에 증수되었으며, 증조인 신호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수되었다. 조부인 주진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수되었으며, 부친 응섭도 동몽교관에 증수되었고, 또 효성이 남달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등에 여러 번 천거되었다.

송기면은 응섭의 4자로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송기면의 자는 군장(君章)이며, 호는 유재(裕齋)·겸산기인(兼山畸人)·병암(屛巖)이라고
불렸다. 유재는 고종 19년(임오:1882년) 9월 16일에 태어나 1956년 75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요교정사가 있는 바로 뒷산에 안치되어
있다.

유재는
5세 때 부친 응섭공이 타계하자 그의 모친이 부친의 뜻을 이어 받아 훈육하였다. 모친은 성품이 너그럽고 슬기로웠으며, 정숙하고 여사의 행실이 있었던
까닭에 신의와 규범이 남달랐다.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는 번거롭게 채찍하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하였고, 또 추운 겨울밤에 공부 할
때도 얼음과 눈을 그릇에 담아다 놓고 졸리면 눈을 씻어 가면서 잠을 쫓았다. 동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면 이불 속에서 낮에 배웠던 공부를 암송하였는데,
하루동안 학습했던 것을 외워서 막힘이 없는 후에야 잠을 청했다. 이와 같이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몇 년 안 있어 공부가 크게 성취하였고, 문장을
아름답게 구사하는 능력이 배양되었으며, 또 사물을 보고는 감정의 표출을 시로 드러냈다.

유재의 학문과 서화

유재는
9세부터 같은 마을에 사는 석정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3세 되던 해에는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강사(講舍:요교정사)를 마련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또한 유재는 글을 읽으면서 서예공부를 하였는데, 석정이 연경에서 가지고온 많은 자료를 보았다. 유재는 석정에게 시 서 예 악 뿐만
아니라 한의학과 역산 등을 배웠고, 그로부터 약장도 물려받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10여년 동안 학문적 진수를 빠짐없이 전수받았다.

유재는 이미 석정으로부터 군자의 도를 배워
철학적 기반을 실용에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학문적 특징은 성리(性理)설에 있기보다는 그 당시에 제기된 개혁사상과
진보사상에 두고있다.

그의 ‘유신론(維新論)’을
잠시 살펴보면 “신(新)이란 구(舊)를 계승하는 것이다.”고 하였고, 또 “유신(維新)이란 옛것을 계승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것은 옛것을 본체로 삼고, 옛것은 새로운 것을 응용으로 삼는 ‘구체신용설(舊體新用說)’을 제기하였다. 즉 유재는 “옛것을 개혁하면서
옛것을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오. 새로운 것에 나가면서도 새로운 것에 그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하여 옛것과 새로운 것, 신구(新舊)의 유기적 연관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즉 공자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철학을 올바르게 재해석하고 있었다. 

유재는 스승 및 벗들과 평소에 간찰로써
많은 사상토론을 주고받았으며,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시 등을 남겼다. 이것을 모아 문인과 유림들이 1959년
봄에 요교정사에서 ‘유재집’을 간행하였고, 이것을 1988년에 다시 한 권으로 편찬하였다. 또 이 ‘유재집’을 2000년도에는 전주대 박완식 교수가
한글로 번역하여 후학도들에게 유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유재집’을 보면 대표적 서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권지일에 필부(筆賦)가 있는데, 즉 붓에 대한 역사와 운용 등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왕희지의 글씨와 안진경, 유공권 등의 글씨를 논하고 또 각 서체 및 서론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부분에 가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붓은)
손에 따라서 변화가 수없이 나오고, 심오한 기교가 정밀한 데 이르러서는, 언어와 문자로써, 형용하거나 말할 바가 아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즉 붓에 관해서 사람들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실 붓의 오묘한 이치는 구태의연하게 입을 빌려서는 말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옛날의 선사들도 도를
전할 때는 말을 하지 않고 어떤 행동을 보여준다거나, 어떤 징후를 보임으로써 깨닫게 만들었던 것이다. 즉 서도를 전함에도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간재와의 인연

유재가 간재와 사제의 인연은 맺게 된 것은
유재의 글씨가 뛰어났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간재가 자신의 스승인 전재 ‘임헌회신도비(예서)’를 세울 때 유재에게
글씨를 부탁했고, 써온 글씨를 보고 “글자의 획들이 살아 움직이듯 찬연하게 빛난다”고 극찬을 했다는 기록이 ‘유재집’에 전하고 있어, 유재와 간재가
만난 것도 이 무렵쯤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 때 간재는 유재의 글씨와 묵죽이 뛰어남을 알고는, 인종대왕이 손수 그렸고, 하서 김인후가 발문을 쓴
‘묵죽판각본’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나무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과 돌처럼
단단한 마음으로 평생을 두고 변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즉 유재는 입신에 근본을 둔 학자로서 스승인 간재와 학문을
토의했고, 또 많은 유학자들과 사상토론을 전개하는 서신을 왕래하였다.

유재는 일제시대를 살면서 충실히 석정과
간재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 숨어서 사는 것이 유학자로서의 가장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즉 끝까지 머리 깎기를
거부했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유재는 왜경들에게 갖은 협박을 당하였다. 또한 길거리에서 일본도로 삭발하기를 강요하는 왜경을 호통치고 집에 돌아와
남긴 한 수의 시는 그의 굳은 의리정신을 짐작하게 한다.

“비구름이 앞산을 어둡게 하고 요망한 기운이
뜻하지 않은 데서 나오는 도다. 비록 저들이 칼로 협박하지만 가슴속의 의리를 어찌 끊을 손가.”라고 했다.

 

사진설명

사진
1 - 유재 송기면의 영정

 

사진 2
– 유재는  ‘요교정사’를 지어 후학들을 위해 지도하였다. 유재는 교육방법이 남달라 많은 걸출한 제자들을 배양하였다. 요교정사 뒤편에는
유재를 모시는 ‘병암사’가 있다.

사진 3
- 인종이 묵죽도를 그렸고, 하서 김인후가 발문을 하였다. 이것은 장성 필암서원에 목판본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사진 4
- 장수군 장수읍내 논개사당과 논개비가 있는 곳에 ‘심원정’이 있는데, 편액을 유재가 행서로 유려하게 썼다. 

 

사진 5
- 유재가 39세 때 간재의 스승인 ‘전재 임헌회신도비’를 예서체로 썼다. 전체적으로 한대(漢代)의 예서풍을 따랐고, 특히 을영비와 사신비 필의가
많이 가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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