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로 쌓은 벽이 있었다.

그 벽을 완성해 놓고 보니 아름다운 모양이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중간에 두 장의 벽돌이 어긋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선생, 벽전체를 망쳐놓은 저 잘못된 벽돌 두 장이 보이지 않나요? 그가 말했다.

“물론 내 눈에는 잘못 얹은 두 장의 벽돌이 보입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훌륭하게쌓아 올려진 998개의 벽돌들도 보입니다.

” 시각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말해주는 어느 책의 인용문이다.

이 세상에 완벽이란 게 있을까? 삶에 정답이 없듯이 누군가 완벽하다면완벽자체가 불완전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 안에서 두장의 잘못된 벽돌만을 생각하며 종종 절망할 때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된 벽돌 두 장쯤 가지고 사는것은 아닌지.나는 그랬다.

자신의 실수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실수나 실패를 생각하면 먼저 전제돼야 할 것이 삶이라는 거대한 내용이다.

요즘힘든 상황을 겪으면서 삶에 대해 더욱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옛날부터 철학의 주제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존재는 자연세계를가리켰고 중세기에는 신이 중심과제였다.

그러는 동안 근세가 되었고 근세는 자연이 과학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존재는 삶의 과제고 그 삶 속에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라는 데 이르렀다.

존재 또한 인간의 삶에 바탕이 되며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철학과 실존철학에 대한 구별도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스스로 존재하면서 자신을 자각한다.

또한 일반이 아닌 자아로서의 자기자각을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자아란 주어진 세계 속에 내던져진 가냘픈 존재이다.

세계와존재, 거기에서 지각하는 첫 번째 심리가 근심과 불안일 것이다.

어떤 대상과의 어떤 충돌들은 피할 수 없고 거기에서 만나는 자아는 나약하고 위태롭고 항해하는 배처럼 고독하다.

나의 경우 실수라는 어떤 상황일 때,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이제일 먼저 시급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기질에서 기인한다.

하이데거가 지적하는인간적 삶의 실상은 이러한 존재론적 불안이다.

아무리 인간이 양심적 결단을 내리고 노력하며 존재를 영원한것으로 만들고 싶으나 그것은 헛된 노력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존재에의 노력은 더욱 허무해지고 만다.

벽돌 두 장, 나는 이러한 브라흐만의글을 읽고 마음에 닿았다.

그 동안 잘해온 나의 좋은 부분은 뒤로 하고 잘못된 나의 실수만 바라보며괴로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가 싫고 내기 미워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괴로워했던 적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삶이라는 그 명제는 그리 만만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그래서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삶이라는 그 위대한 이름 앞에서좋은 부분만 겪고 이승을 떠난다면 그것이 진정 삶이라 지칭할 수 있을까? 벽돌 두 장의 나의 실수도관대하게 바라보며 그 이후 벽돌을 충실히 쌓으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나의 실수까지 포함한 나의삶을 사랑하리라. 나의 삶,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자신에게 말해주리라.  

/이은송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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