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이경섭씨 남원 도통동 ‘이경섭 아틀리에’. 지난 10일부터 전시장으로 개관했다는 소식이 왜 그리 반가웠을까. 미술이라면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원에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공명심이 발동된 터였을 것이다.

오래 전 모 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도 해서 가뿐한 마음으로 찾았더니 이번엔 소탈한 작가의 환대로 어쩔줄 모르겠다.

서양화가 이경섭씨(50)와의 첫 대면은 그렇게 이뤄졌다.

“6년 동안 몸과 마음을 두고 작업했던 공간을공개하는 셈이지요. 작업실을 그대로 펼쳐 보인 까닭은 좀더 색다르고 재미있으면서도 여유있게 관람하자는 차원이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여유’는살래야 살 수 없는 보물이 돼 버렸잖아요.” (웃음)그랬다.

갤러리라는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 시공간적 여유를 제공하자는것이 발로였다.

그의 의도답게 연대기별로 보여지는 작품 감상 재미는 빼놓을 수 없다.

한동안 그가 천착했던 ‘박수근화풍’에 이어 민둥산에 개들이 등장하는 그림, 근작까지 이르면 다양한 작업 스펙트럼에놀란다.

그 뿐 아니다.

한눈에 읽히는 전업작가로서 쉽지 않았을 우여곡절. 자전적 고백은 일관되게 그를 대변해준다.

질감은 물론이고 양감을통해 그가 사유하고 경험한 행간을 한껏 뿌려놓았으니 칙칙하고 무거운 감이 없잖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마주하면 성자의 행복과 만나는 기쁨에 빠져든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음…, 돈을 벌어본 시절이있었나. 3~4년 미술학원 했던 것이 전부 같네요. 아이들도크고 하니까 지금은 좀 후회가 돼요. 그래 아내한테 늘 미안하죠. 그런미안함과 애틋함도 그림 속에 녹아있을 것입니다.

”전업작가를 권유했던 아내 최영자씨(남원중 국어교사)가 그에겐 천사였다.

20여년넘게 뒷바라지 하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으니 더더욱 미안하다며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그저 막연하게 ‘작가’를꿈꿨다.

딱히 화가도 아니었으며, 작곡가나 문인도 선망했다.

초등학교 때 원작을 각색한 만화로 친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면서도 창작할 수 있는 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고교시절 미대로 야무지게 포부를 정한 뒤부터야 ‘화가’가 목표점으로 들어왔다.

허나 그도 쉽지는 않았다.

군산대 미대에 진학한 뒤 혼란한 정국이열정적인 그를 가만두지 않았던 것. 학생운동에 연루돼 퇴학까지 당한 그는 다시 전주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한다.

정체성마저 혼란의 연속이었으나 그림만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런고집이 재차 그를 학교로 몰아넣은 셈. 어쩌면 그 때 세상에 대한 인식의 폭이 꽤나 넓어졌을 거라고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깊은 생각은 자신의 내면을 꼼꼼하게 살펴보게 하고,의식의 폭을 확대해 포용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힘으로 우뚝 설 수 있는 힘을 비축할시간을 갖기 못한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혼란기 다시 공부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저는없을지도 모릅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더라면 그림이 사납지 않았을 거라는 이씨.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누군가 자신의 작품이 어둡고 사납다고 평하면 이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움찔하곤 한다”면서“작품은 작가를 반영하는 만큼 하는 수 없다고 다잡아보지만 씁쓸함은 여전하다”고 고백한다.

이곳 전시는 30일까지 계속된다.

7월 서울 인사동 초대전을 앞두고 있어 한시도 쉴 틈 없으니 작업하는 작가 모습도 세트로 감상할 수 있다.

예서 제서 꽃소식으로 분분하다.

망중한의 틈을 내 남원 ‘이경섭아틀리에’로 가보시라. 이씨의 작품세계를 적나라하게 보는 즐거움은 물론이고 오가는 길 꽃구경재미도 쏠쏠하다.

/김영애기자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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