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유럽은 일본문화에 열광했다.

단순한 일본취미를 넘어 문화예술 전반에 영향을 끼치며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문화현상으로 발전하였다.

자포니즘의 중심에는 일본의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가 있었다.

1853년 일본의 개항이후 일본 공예품이 유럽에 수출되면서 이를 포장하고 보호하는 완충제 역할을 하던 우키요에에 유럽의 미술가들은 열광했다.

당시 살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모색하고 있던 진보적 작가들에게 우키요에는 새로운 표현의 돌파구를 제시한 것이다.

우키요에(浮世繪)는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 서민문화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풍속화라 할 수 있다.

17세기의 안정된 정치상황은 경제적, 문화적 발달을 가져왔다.

상공업의 발달은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져, 사회적으로향락적 긍정적 인생관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우키요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종래의 산수화나 화조화 대신 남녀간의 정사를 담은 춘화도나 게이샤, 광대, 가부끼의 주인공 그리고 명소풍경 등 일반서민의 관심이 판화의 주제로 표현되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전시를 계기로 더욱 확산된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드가, 고흐, 고갱, 휘슬러 등 많은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인상파를 대표하는 모네는 일본미술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내 작품의 원천을 정말 알고 싶다면 옛 일본인들과 연관시켜보면 된다.

나는 언제나 그들의극히 세련된 취향에 매료되었다.

그림자를 통해 존재를 느끼게 하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암시하는 그들의 미감은 나에게 감동을 준다”고 하였다.

특히 고호의 ‘비 내리는 다리(1887)’는 당시 화가들이 얼마나 우키요에에 심취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안도 히로시케(安藤廣重, 1797~1858)의 ‘에도 명소 백경’ 연작중 하나를 그대로 모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키요에의 단순한 선과 색, 위에서 조감하는 듯한 시점, 원근법의 무시, 중앙에서 벗어난 구도, 경사진 선의 사용 등은 서양 회화의 오랜 규범을 무시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로써 우키요에는 19세기 후반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서양미술의 변화를 유도를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사진설명 = 안도 히로시게의 에도 명소 백경 중 ‘오하시와아타케의 천둥(브루클린 미술관)’.

/김영애기자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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