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달빛! 저 달빛은 흘러나려/ 내 창문 앞 비치이며 내 가슴 비치이누나!/ 저 광활한 저 달빛! 저 달 속에 이 내 가슴 비치이어/ 오! 이 내 가슴속 비치이여서이 가슴 살펴 보오리/ 저 달빛! 저 달빛은 흘러나려/ 내 친구 앞 비치이어 내 가슴 밝혀 주오리!/ 저 광활한 저 달빛! 저 달 속에 내 친구 맘 비치이어/ 오! 내 친구 맘속 비치이여서 그 모습 찾아 보오리/ 아! 아!”때는 양력으로는 1945년 8월22일 밤, 음력으로는 그 해 7월15일 즉 7월 대보름날밤 오후 9시에서 9시반까지 사이의 시간이었다.

이 때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꼭 1주일이 되는 날이다.

당시 구두회는 평양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서 당시 일본군의 군수공장들이 모여있던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강선리, 일반적으로 ‘강선’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는 초리국민학교 교사였다.

이 당시 처녀 부인인 김경환은구 청년이 있던 강선역에서 한 정거장을 더 내려가 기양이라는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약 10리쯤 더 강서군의 중심부위로들어가서 강서군의 군청소재지인 강서읍 덕흥국민학교에서 역시 당시 여자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면하기 위해 일부러 국민학교 교사시험을 치러 합격하고발령받아 그곳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시기였다.

해방 전까지 교사들이 순번으로 숙직하되 항상 학교 숙직실을 이용했으며, 바로그 학교 숙직실 건물 옆에는 학교장의 관사가 있었다.

그 학교 교장은 일본인이었는데 일본의 전세가 불리함으로시국이 불안하자 항상 긴 일본도를 손에 들고 출근하여 자기의 좌석 옆에 두고 근무했다.

그의 품에는 또 다른 일본 단도가 있기도 했다.

이 모두 자신의신분을 보장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평시에 보았던 터라 8.15해방이 된 후 조선인 교사들은 숙직이 기분 나쁘고 불안해서 숙직실을 기피하고 다른 곳을 이용했다.

바로 이 무렵 구두회에게도 숙직 당번이 돌아왔다.

구두회 역시 꺼림직해서 학교의 사친회장에게 그러한 심정을 털어놓으니까 “왜 그렇지 않겠느냐?”면서 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는 자기집을 내주었다.

그날 밤 9시경. 달 밝은밤이어서 그랬던지 그 집 주인 내외는 친척 집에 놀러 가고 없었다.

아무리 사친회장이 흉허물 없이 지내는사이이긴 하나 막상 주인이 없고 보니 갈등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 집 안마당에 보릿단 두 서너 개를 땅에 깔고 앉아 하늘을 쳐다보니 휘황찬란한 달이 한이 없어 자연히상념에 젖었다.

그때 작곡한 곡이 바로 ‘사우월’이다.

즉흥적으로 작사해가며 동시에 머리에 떠오르는 악상을 5선지에 그려내 예술가곡이 탄생되게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사랑하는 김경환에게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일장신대 음악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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