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중 하나가 종합병원 중환자실이다. 일단 응급실을 거쳐 이곳에 오게 되면 차도에 따라 일반 입원실로 옮겨지기도 하고 또는 주검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곳에 있다보면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능력은 여전히 한계가 있고, 생명은 어디까지나 신(神)의 영역이라는 걸 절감하게 된다. 명의(名醫)일수록 더욱 진지하며 겸손한 것도 이 같은 깨달음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참으로 모진 것이 생명인가 하면 또 참으로 허망한 것이 생명이다. 극단적이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죽을 운명의 환자는 죽고 만다는 게 의사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살 사람은 설사 치료가 약간 부실해도 기어코 산다는 논리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병을 방치해도 좋다는 얘기는 분명 아니다.

어쨌든 생명을 복제할 정도의 눈부신 생명공학 발달로 불치의 병들이 하나씩 정복돼 어느 정도의 건강유지와 수명연장이 가능해졌지만 자꾸만 새로운 병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 어떤 절대자, 즉 신의 숨결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멀쩡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교통사고나 불의의 사고로 숨지는 것을 보면 ‘운명의 작용’ 같은 걸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권세라고 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근원적인 생사문제가 이럴진대, 기타 세상사, 가치가 불분명하거나 불의한 일에 너무 집착해 목매다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측은함까지 자아내게 만든다. 대부분 성찰이나 분별없이 이익추구사회 분위기에 휩싸여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핏대세우며 모든 일에 조금도 손해보려 하지 않고 ‘까락까락’ 따져가며 각박하고 매정하게 살아들가지만 그 뒤끝은 분명 허망이요 후회일 텐데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실 세상적인 건 거의 모두 유한적이다. 명예도 재산도, 즉 부귀공명 그 자체가 뜬구름이다. 아무튼 잠시 왔다 가는 세상, 누구도 살아있음이 그리 길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조금은 여유를 지니고 관조하는, 그러면서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인간사회가 그립다.

/서재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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