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랭이 하늘 거리고/ 진달래가 반기는 언덕/ 깨어진 꿈 추억을 안고,/ 오늘 나는 찾았네/ 내 사랑아 그리운 너/ 종달새에 노래 싣고서/ 그대여 황혼의 노래/ 나는 너를 잊지 못하리/ 마음 깊이 새겨진 사랑이 아롱지네/ 맑은 시내 봄 꿈을 안고/ 어린 싹이 눈을 비빌 때/ 그 옛날의 아른한 모습, 내 맘에 새겨진다.

” 김노현은 원래 직업이 치과의사였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여 작곡가가 돼 이 곡을 남긴다.

때는 1970년 봄, 고향생각으로 울적한 맘을 달래려 부여의 낙화암을 찾았다.

고향인 평양의 대동강변과 능라도의 반월섬 등에서 뛰놀던 어릴 적을 회상하기로는 최적의 경치가 그 곳 낙화암 주변에 있었던 것이다.

낙화암에 올라 백제멸망과 궁녀들의 한 많은 죽음을 생각하다 진달래 피고 아지랑이도 너울거릴 고향생각을 떠올렸다.

서쪽 수평선에 잠기는 황혼녘이라 애수는 더욱 짙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선 그로서는 고향이 더욱 그리워졌을 일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시를 토해낸다.

그리고 곡을 붙였다.

악보를 정리한 곳은 전쟁 후 살아온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자택 겸 병원인 인성치과에서였다.

곡의 초연은 1975년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성악회의 회원발표회에서였다.

성악가이자 의사이며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던 박성태씨가 불렀다.

그 후 엄정행·신영조·박인수·백남옥·강화자씨 등이 불러 방송과 레코드로 소개됐다.

실향민인 김노현은 1920년 치과의사인 김재조와 어머니 조재만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덕에 숭실중학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러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다.

성악가가 되기 위해 성악가 박원정, 숭실전문 교수인 루스 부인(선교사), 이화전문 교수인 일본인 성악가에게 지도받기도 했다.

1940년대 초반은 그에게 파란만장한 고난기였다.

학교에서 학생회 총회장, 기독학생회장, 음악부장을 역임해 자연히 일제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왜경의 감시대상이었던 그는 1942년 10월 학생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다.

1년간 징역을 산 뒤 출옥하자 일본인들은 그를 죽이려 밥에 콜레라균을 투입했고 그 밥을 먹고 출감한 날로부터 두 달 동안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약도 없던 때라 치료가 용이하지 않았고, 독실한 기독교인답게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만약 살려주시면 일생동안 음악으로 주님께 보답하겠다”고 약속한 뒤 일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교회음악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로 성악가를 접고 치과병원을 개업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성악활동에 적극 매달렸다.

그가 운영하던 치과는 의사라고야 자신뿐이었지만 음악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병원을 비웠다.

하고픈 일을 하면서 후회없이 산다는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런 덕택으로 그는 한국성악회 회장, 한국벨칸토회 회장, 작곡가회 회장을 역임한다.

1993년 그는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통일이 된다면 꼭 대동강변에 그의 노래비라도 세워주고 싶다.

<한일장신대 음악학부 교수>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