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기 김제문협 지부장
 우리는 날마다 문화라는 말을 쓴다.

교통문화, 문화생활, 대중문화, 음식문화까지 문화는 독립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다른 말과 결합하여 쓰기도 한다.

물론 신문마다 문화면이 있고, 방송매체에서도 문화계 소식 등이 있다.

그러나 날마다 쓰는 문화라는 말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화라는 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숨을 쉬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또는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굳이 숨을 쉰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숨을 쉰다.

또 살아있는 사람 대부분 숨을 쉬면서 전혀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문화라는 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삶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문화라는 말을 따로 정의하는 것이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소반을 덮는 상보가 있었다.

대부분 쓰고 남은 헝겊 조각을 이어 붙인 평범하고 흔한 소품이었다.

우리는 상을 덮는 단순한 기능만 보았으나 안목이 높은 외국의 수집가는 이 상보를 아주 훌륭한 작품으로 해석하고 수집하였다.

문화지수가 높은 그들은 훌륭한 작품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예술작품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의 눈에 띄어서 인정을 받기도 하였겠지만, 문화수준에 따라 작품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상을 덮는 천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보의 가치를 먼저 발견한 외국 수집가의 해석을 차용하여 다시 우리의 상보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상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없이 그저 평범한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든 상보로만 기억하고, 헝겊조각을 이용하여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드는 절약의 미덕과 바느질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다.

그러나 생활수준의 향상과 함께 문화수준이 높아지면서 상보를 보면서 새로운 해석을 한다.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회화적인 가치가 높은 훌륭한 작품을 남긴 그네들의 이야기를 외국인 수집가의 해석을 차용하여 다시 쓰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상보를 창조하고 늘 상보를 들추며 살았던 사람답게 상보에 대한 이미지가 잔잔하게 녹아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상보를 구성하는 기하학적인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 상보를 구성하는 색깔에 대한 해석, 상보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해석 등 미학적인 차원에서 아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 해석을 식탁의 디자인에 응용할 수 있고, 주방을 구성하는 가구의 디자인에 쓰는 등 적극적으로 삶에 반영해야 한다.

이렇게 문화가 산업에 녹아 들고 산업을 통하여 문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문화의 우월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렇게 문화는 의식주에 곁들어 삶을 관통한다.

문화는 삶의 전 과정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삶에서 문화를 빼면 인류의 삶이 아니라 무기물의 삶처럼 무미건조하다.

대부분 문화생활을 한다고 할 때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유명한 뮤지컬을 보는 것을 문화생활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문화생활을 한다는 것은 극장에 앉아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삶의 전 과정에서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다.

문화생활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창조적으로 문화를 만들고, 다른 사람이 생산한 문화를 같이 공유하고, 다시 해석하여 새로운 문화에 젖어 드는 순환의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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