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구사회교육부장

  아들의 손을 잡고 한옥마을을 걷는다. 토요일 오후. 새로 단장한 은행나무길 위에서 5월의 정경을 몸으로 느낀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나선 길이다. 주차하기 위해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번잡스러움도 벗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본 것 또한 얼마만인가. 따스한 햇살과 정겨움에 몸과 마음이 나른해진다.

은행나무길 초입에는 아직도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길의 역사이자 상징이다. 노구(老軀)를 지팡이에 의지하고는 있지만 그 기상은 여전하다. 가지는 하늘로 죽죽 뻗어 있고, 녹색 이파리가 무성하다. 몸은 비록 불편하지만 아직도 청춘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은행나무길을 걸으며 공간을 넘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회색빛으로 삭막하던 뒷골목이 운치 있는 정원으로 되살아났다. 돌길과 꽃과 나무와 실개천과 폭포로 단장했다. 돌길 따라 이어진 실개천에는 부레옥잠이 ‘두둥실’ 떠다니고, 이끼 푸른 돌 틈 사이로는 폭포수가 흘러내린다. 화단에는 붉은 패랭이꽃과 노란 팬지, 잉크 빛깔 붓꽃이 생글거린다.

화단은 주변 한옥 뜰과 한 몸이다. 담장도 없는 마당과 대문 활짝 열린 기와집은 돌길과 경계도 없다. 화장기 없이 소박하게 앉은 가게들도 한 묶음이다. 길을 걷는 것인지, 뜰을 거니는 것인지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된다. 길가에 새로 심은 소나무, 단풍나무, 사철나무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

쌈지공원에 세워진 정자에 올라 짐짓 한가로움의 호사를 누린다. 사람 많은 곳에서는 사람 구경이 제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서두르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유유자적(悠悠自適)이다. 평온한 표정에 맑은 얼굴. 가족들도, 연인들도, 아이들도, 일본 아줌마들도, 서양 젊은이들도 모두가 넉넉한 한 얼굴이다.

10여년만에 오목대에 오른다. 공예품전시관을 돌아 오목대까지 오솔길이 놓였다. 나무로 만든 숲속 계단을 오르다 보니 다리가 풀린다. 그동안 자동차에만 기대어 살아온 게으름 탓이다. 오목대에 오르다보니 한옥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래전 이곳에서 내려다보던 한옥 마을이 ‘오버랩’된다.

오목대에서 내려다보는 한옥 마을은 칙칙했었다. 흑백 화면이었다. 그 회색 바탕 속에서 이곳저곳 빛바랜 파란색이 화면의 정적을 깼다.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돼 증개축마저 제한되면서 집집마다 파란색 ‘가빠(포르투갈어 capa-비바람을 막기 위한 두꺼운 천에 고무 같은 것을 먹인 천)’를 뒤덮었다. 빗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 지지리 궁상이었다.

이제는 채색된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며 ‘블루 오션’을 생각한다. 한옥마을이 전주만의 색깔을 갖고, 미래 산업으로 재창조되고 있음을 본다. 스러져 가는 한옥마을에 문화와 예술을 불어넣고, 전주의 ‘아트’를 스며들게 해 전주만의 명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본 것이다. ‘고물’로 치부했던 ‘팔각시계’가 ‘골동품’임을 처음 발견한 심정이다. 

사양길을 걷던 서커스를 예술로 승화시켜 새롭게 창조한 ‘퀴담’인 것이다. 길거리의 가난한 저글러였던 ‘기 랄리베르테’가 죽어가던 서커스에 무대와 조명과 음악과 무용 등을 결합시켜 회생시킨 보물. 그가 1984년 창단한 ‘태양의 서커스’는 20년만에 ‘퀴담’, ‘알레그리아’ 등 13개 작품으로 연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꺼져가는 서커스를 재창조해 해마다 전세계 6천만명 이상이 관람하는 명품이 됐다.

은행나무길을 만든 송하진시장에게서 ‘기 랄리베르테’의 창조성과 발상 전환을 기대하게 된다. 은행나무길 위에서 전주가 자부하는 ‘블루 오션’으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본다. 송시장의 문화적 토양과, 그 묵향 속에서 성장한 문화적 ‘아비투스(Habitus)’는 전주를 미래 명품으로 만들어가는 밑바탕으로 손색이 없다.


한옥마을이 ‘고물’이 아니라 ‘골동품’임을 은행나무길을 통해 새롭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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