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변화에 따라 미술의 형식과 매체 역시 변화를 거듭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텔레비전 모니터와 비디오를 이용한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의 예술적 가능성에 맨 처음 주목한 작가가 바로 백남준(1932~2006)이다.

백남준은 1932년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백낙승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 공립중학교 시절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다 1949년 홍콩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였다.

현대음악의 창시자로 꼽히는 아놀드 쇤베르크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했다.

독일에서 음악공부를 하던 중 음악에 우연적 요소를 도입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백남준 예술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심지어 백남준은 1959년에 ‘존 케이지에 대한 찬사’라는 해프닝을 벌인 바 있다.

1960년에는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이란 제목으로 공연을 하였다.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다 갑자기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더니 객석으로 내려가 가위로 앞줄의 존 케이지 넥타이를 잘라버리고는 공연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이 지난 뒤 술집에서 공연장으로 전화를 걸어 공연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백남준은 ‘음악의 테러리스트’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전위예술그룹 플럭서스(Fluxus)의 멤버가 되어 요셉 보이스 등과 함께 퍼포먼스, 전자음악, 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였다.

1963년에는 최초로 텔레비전을 이용한 첫 번째 전시인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전을 열었다.

전시장에는 3대의 피아노와 십여 대의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자석을 이용해 화면의 이미지를 변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초기에는 기존의 영상을 뒤섞는 작업을 하다 70년대부터는 서구의 테크놀로지와 동양의 사상적 만남을 시도하였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생존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회고전이 개최됐는데 나선형 미술관 구조를 활용한 레이저 폭포 ‘야곱의 사다리’를 선보였다.

뇌졸중으로 거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휠체어를 타고 준비한 당시의 전시는 26만이라는, 개관이래 최대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새로운 예술의 형식을 발견한 거장은 2006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자택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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