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렬 작곡 ‘바우고개’ 바우 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우 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 즐겨 꺾어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우 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바우 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로 시작되는 가곡 ‘바우고개’는 이흥렬선생(1909-19809)이 25세 때 만든 곡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던 조국산천을 바우고개로, 무궁화꽃을 진달래로 비유한 작품이다.

민족의 울분을 아련한 모정에 담아 서정적으로 표현했으며 가사에서 풍기는 그리움이 눈물겹도록 애절하다.

1909년 7월 17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이흥렬은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두 분의 누이도 일찍 죽어 형님과 함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의해 자라게 되었다.

이흥렬의 술회에 의하면 자신이 음악을 하게 된 이유 중에는 첫째, 고향 원산이 ‘한국의 나폴리’라 불릴 만큼 자연 풍광이 아름다웠고, 또 항구에는 세계 각국의 군함들이 들어와 해군군악대들이 시가 행진을 하며 멋진 군악을 연주. 자연스럽게 음악에 빠져 들 수 있었고, 둘째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종교적 가정교육을 받아 교회의 종소리와 선교사가 연주하는 오르간 소리가 음악의 씨를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경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푼푼이 돈을 모으며 피아노에 매달렸던 그는 피아노에 정열을 쏟는 정성이 갸륵했던지 고향의 어머니가 매달 30원씩 부쳐주어 겨우 돈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가 없던 그는 졸업 연주에서 A급이 모여있는 3부에 기필코 나가기 위해 피아노를 반드시 사야 했고, 결국 어머니에게 400원을 송금 받아 피아노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흥렬은 졸업연주회에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동경생활을 마감했다.

1931년 동경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귀국한 그는 독일 유학을 생각했지만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피아노를 가지고 고향으로 귀향했다.

이때부터 1957년까지 원산 광명학교, 경성보육학교, 배재중학교, 풍문여자중·고등학교 등지에서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동요작곡을 시작했다.

작곡가 자신이 노랫말까지 쓴 이 ‘바우고개’는 우리 나라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장도로 유명한 노래다.

‘바우고개’는 작곡된 지 20년 뒤인 6.25때 부산에서 김혜란씨가 무대에서 불러 널리 애창되었다.

전란 속 피난민들의 가슴을 울리고 달래는 깊은 힘을 가진 이 가곡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져왔다.

바우고개로 인하여 그에게는 '바우고개 할아버지'라는 별명마저 붙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찾은 글이다.

엄마 나이 서른 아홉에 /16살 어린 딸을 두고 떠난/불쌍한 우리엄마가 자주 불렀던 노래입니다.

/6살 철부지 딸을 데리고 재혼한 우리 엄마/새 아버지에게서 동생 셋을 더 두셨지만/ 데리고 온 첫 딸이 늘 찬밥신세 밀려나는 것이 /가슴 아파 우셨던 나의 불쌍한 어머니 /어머니/새 아버지 앞에서는 늘 엄마가 먼저 구박을 주시곤 /제 손에 눈깔사탕 한 개 챙겨 주셨습니다.

/새 아빠는 사탕 한 개, 과자 하나라도 /데리고 들어 온 딸에게는 아까워했습니다.

/새 아빠 손에 과자봉지 들려 오는 날이면 /엄마는 저녁 설겆이 끝내고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는 첫 딸이 안타까워 /어떡해서라도 그 딸을 어스름한 밤에 야단쳐 내 보냅니다.

/동생들 과자 먹을 때/첫딸은 곁에 있어도 먹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절대, 경숙이 너도 하나 먹으라는 말 안 하는 새 아버지 /갈 곳 없는 어린 딸은 /엄마가 야단치면 눈치채고 /습관처럼 옆집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갑니다.

/밤 늦도록 테레비 보다 옵니다.

/늦었다고 친구엄마가 집에 가라고 하면 집에 옵니다.

/다들 잠들은 밤 /살금 잠자리에 찾아 들면 엄마는 딸의 손을 꼭 잡아 줍니다.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불쌍한 이 딸이 /엄마는 가슴 한 켠에 송곳보다 더 아픈 고통이었나 봅니다.

/그 한이 가슴에 맺혀 39살 젊은 나이에 /울 엄마는/인생의 허허벌판에 나 혼자 두고서 /1976년 12월 5일 /8살, 6살, 4살 어린 동생들을 두고서 /눈도 감지 못한 채 그렇게 /먼저 /급히 /혼자서만 /먼 길 떠났습니다.

살아생전에 엄마는 ‘바우고개’ 이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오늘 갑자기 생각나서 한번 불러 보았더니 눈물만 비 오듯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더없이 편안해 지네요. 이 곳에 올리고 싶은데 기술이 없어 가사만 올려 봅니다.

엄마의 노래, 엄마와의 추억만이 날 행복하게 해 주네요. 우리 엄마 참 이뻤답니다.

엄마! 이제는 항상 내 곁에 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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