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오며는/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두었던/ 옛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줍니다.

”김소월 작사, 정세문 작곡의 가곡 ‘옛이야기’는 인생의 허망함을 선율로 표현한 곡이다.

곡 속의 주인공은 극도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겪는 듯 허허롭기까지 하다.

작품 분위기도 억제되어 극히 단순하고, 마치 삶의 현실이 그러하듯 황량하고 메마름으로 가득하다.

선율이 메말랐고 가사는 온통 서글픔뿐이다.

작곡가 정세문은 3.1운동 직후인 1923년 북쪽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인 철원의 북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다니던 회산국민학교는 교실이 두 개 밖에 없는 남녀공학이었다.

가난하고 조그마한 농가의 자녀로 태어난 정세문. 그러나 그는 학급의 반장이었다.

운명의 장난이 그렇듯 부반장은 면장집 딸로 공부도 잘하고 예뻤다.

가난한 그의 집에 비해 그녀의 집은 어린 소년의 눈엔 궁궐보다 거대하고 화려했다.

임금님집 같은 곳을 자주 드나들게 됐고 그녀 같은 사람과 결혼을 했으면 하는 생각도 품게 된다.

두 살 위인 그녀의 언니도 공주같이 예뻐 보여 늘 흠모의 대상이었다.

어느덧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서울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는 사범학교에 입학한다.

방학은 그의 새로운 기다림이었다.

그녀와 만나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그녀는 어디론지 이사를 가버렸고 그 역시 서울에서 교사가 된다.

그는 서울음대 학장이었던 김성태 박사의 권유로 서울음대에 입학하게 됐고 청춘의 꿈을 불태워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6.25가 터지고 그는 군악대로 종군했고 이후 제대하여 경기여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 한 부인이 학교로 찾아왔다.

면회실에서 그 부인을 보고 한동안 멍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소녀의 두 살 위 언니였다.

소녀시절 공주 같았던 모습은 간데 없고 생활에 지친 초라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의 동생은 어느 시골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대답도 들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의 ‘옛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비극에 눈물을 흘렸던 작곡자 정세문. 소녀의 언니를 보는 순간 슬픈 ‘옛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다.

작곡을 위해 소월 시집을 들고 다녔던 그는 곧바로 오선지를 찾았다.

이렇게 태어난 ‘옛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으나 깊이가 있어 서서히 젊은이들의 애창곡이 돼갔다.

원로성악가면 의례 읊조리는 곡이 ‘옛이야기’이다.

또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작곡자로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많지 않음이 늘 아쉽다.

박목월은 이 시의 1절 ‘밤이 오며는, 밤이 오며는’과 3절의 ‘가신 뒤에는, 가신 뒤에는’의 반복이 갖는 애달픈 심정을 짐작하면 이 시의 서러움을 한결 깊이 느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 그 소녀!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한일장신대 음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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