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피는 꽃이 뭐가 있을까요? 밤꽃·금계국이 한창이군요. 봄에 미칠듯한 마음은 꽃이 흩날려서가 아닐까요? 여름꽃은 흩날리지 않아 견딜 만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전시를 마쳤으니 봄을 보내고 여름맞는 심정으로 새롭게 시작해야지요.” 조각가 전종규씨(54). 그가 지난 9일까지 익산솜리예술회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봄날 미칠듯한 마음들이 담겼을까? 작품 대부분이 활달하면서도 솔직한 게 이내 마음을 끈다.

특히 오랫동안 그가 붙잡고 있던 ‘풍악놀이’ 시리즈는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사랑’ 시리즈와 ‘Shi’ 시리즈, ‘풀밭에서’, ‘꽃과 여인’ 등도 미려하기는 마찬가지. “풍악놀이 시리즈 어때요? 이 화두를 붙들고 온 게 벌써 20여년 가까이 됐으니…. 모든 사람이 풍족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뿍 담았어요. 이는 또 전통 민속놀이를 재현하는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좀더 첨부한다면 각박한 콘크리트 문화에 정서적인 감성을 불어넣고 싶었달까요.” (웃음) 그는 그토록 ‘풍악놀이’에 집중했다.

아니 오히려 집착에 가까웠다.

1991년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20여년 ‘풍악’과 씨름했다.

당시 미술관을 돌며 봤던 ‘미켈란젤로’나 ‘헨리무어’의 진면목은 잠자던 인식을 일깨우는 매개였고, 그곳에서 만난 세계적인 조각가들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됐다.

“2개월 동안 미술관을 정신없이 쫓아다녔어요. 특히 무어의 초기작부터 말기작품을 접하면서 한 사람의 영혼이 그리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지요. 그제서야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 말하자면 유럽여행이 준 선물이었던 셈. ‘풍악놀이’로 거듭난 그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 한번 변신을 시도한다.

코드는 인체 해부학적 접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마음의 자리를 찾아갈 심산이다.

“그 동안 구상에 집중했다면 이젠 비구상을 염두에 둡니다.

자신을 해체하겠다는 얘기지요. 자신을 낱낱이 분해해 우주의 섭리를 살펴보고 싶달까요. 말은 거창하나 그 의미는 자못 단순합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지요.” 그의 변신은 이미 오래 전 예고됐는지 모른다.

가수 꿈을 접고 동양화가의 길로, 다시 조각가의 인생을 살게 된 배경들이 그 변신의 숙주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익산 성당면에서 태어난 그의 꿈은 가수였다.

고교시절 음반까지 냈을 정도니 그 실력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 허나 대학진학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미술로 과감하게 전향한다.

이는 그가 당시 동양화수업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한 뒤 ‘동양화’로 진로를 정한 그는 3학년 무렵 조각으로 전공을 바꾼다.

드디어 평생 함께 갈 조각가의 인생이 결정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순전히 손재주가 좋았던 부친의 영향 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노래를 등질 수도 없었다.

지금도 ‘모창’이라면 둘째를 서러워할 수준. 나훈아는 물론이고 남진의 노래라도 불러 제치면 듣는 이들은 그의 전공을 의심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내 일상으로 돌아와 한국의 ‘헨리 무어’를 꿈꾼다.

‘관(觀)’과 ‘찰(察)’은 작업정신의 두 기둥에 다름 아니다.

넌지시 시대와 현실을 바라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하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그가 무어처럼 큰 작가가 돼 우리 주위를 배회하지나 않을는지…. “삶은 고독과 갈등의 경전이라고 봐요. 이제 인체를 부수면서 자화상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생각이지요. 설혹 자기애에 빠져 나르키소스처럼 한송이 수선화로 피어나더라도…. 근원적인 고독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웃음)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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