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 부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중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던 유물은 단연코 ‘전(全)’과 ‘관(官)’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명문와편(銘文瓦片)’이었다.

무엇보다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의 ‘상징성’과 글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지역 문화계는 ‘후백제(後百濟)’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흥분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통일신라’가 ‘후백제’보다 앞선 시대였던 만큼 감영부지에 뭔가 중요한 시설이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현재까지 알려진 후백제의 주무대는 승암산의 동고산성이 전부였다.

견훤의 왕궁터로 알려진 ‘동고산성’에서 출토된 막새들이 ‘도성(都城)’의 흔적을 보여줬음에도 뒷받침할 자료가 없어 ‘궁성’으로 정리된 것이다.

발굴에 참여한 연구자들도 ‘명문와편’이 동고산성 기와와 일맥상통한다면서 후백제와 유관한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봐도 분명 쉽게 넘길 일은 아니다.

또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도심에 관청이 있던 장소를 놔두고 ‘산성’을 ‘궁성’으로 택할 리도 없다.

‘후백제’는 892년 견훤이 세운 나라다.

신라·태봉(후고구려)과 함께 후삼국의 하나였다가, 936년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멸망했다.

막강한 해군과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수도는 완산주(오늘날의 전주시)였다.

‘전주’를 유일하게 수도로 세웠던 나라였던 만큼 ‘후백제’는 전주로선 시대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런 와중에 발굴된 ‘명문와편’이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지역문화계도 ‘명문와편’이 후백제의 무대를 확장시킬 수 있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면서 전문가들이 나서라고 요구한다.

해석의 범람은 위험하나 절맥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자세는 매우 유용한 법이다.

실재가 유실된 탓에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언어와 침묵 사이를 가로막아 온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절대 미뤄둘 일이 아니다.

기와조각 하나에 그리 떠들썩하냐고 핀잔 줄 이도 있을 것이나, 이를 도외시하면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좋은 하나의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채근하는 ‘문화계’의 주장을 귀담아 듣고 전북도와 전주시가 적극적으로 나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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