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김문성씨(41·전북음악연구회 대표). 그처럼 재능 많은 이가 또 있을까? 우연히 초등학교때 기타에 눈을 떠 ‘기타리스트’가 됐고, 중학 시절에는 시에 미쳐 살다 또 화가가 되고 싶어 그림에도 입문한 바 있으니 ‘멀티 엔터테이너’란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인가. 그에게 ‘시’와 ‘그림’은 여전히 이뤄야 할 꿈이다.

절대 취미로 끝내지 않겠다면서 죽을 때까지 해보겠다고 벼르는 그이고 보면 그 ‘미망(未忘)’과 타협할 마음은 결코 없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기타리스트’로 사는 게 행복하다니…. 알쏭달쏭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기타와 함께 한 세월은 벌써 30여 년. 연주계서 외면당하고, 관객들로부터도 대접받지 못하는 ‘클래식기타 1세대’라는 척박한 현실을 극복해야 했음에도 그는 늘 성실한 연주가를 자처한다.

“인생이란 게 참 우스워요. 어느 날 우연히 누이가 쓰던 통기타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 꺼내 먼지를 닦고, 교재를 뒤지기 시작했어요. 일주일 동안 밤샘하면서 ‘로망스’ 한 곡을 정복했지요. 기타와의 인연은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서양화 공부를 하면서 미대를 준비하던 그는 돌연 클래식기타로 전공을 바꾼다.

이 역시 우연이었고 그나마 유일하게 전공이 개설돼 있던 평택대(당시 피어선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만해도 국내 연구자들이 부족해 외국인 스승으로부터 사사하던 즈음. 그는 이런 상황을 복이 많은 연유로 정리한다.

“외국인 스승을 만났던 게 행운 같아요. 실력뿐만 아니라 그분의 고국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거든요. 기타와 문화까지 한꺼번에 섭렵할 수 있었으니 복이 많았지요. 그래서 유학까지 겁내지 않고 단행할 수 있었고요.” 그의 실력은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을 정도. 평택대를 졸업한 뒤 1992년 스페인 마드리드 음악원을 수석 입학했고 다시 3년 만에 최고성적으로 졸업하면서 실력을 한껏 과시했다.

11남매중 막내였던 그는 형제들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

말수 적고 숫기 없는 그에게 나이 많은 누이와 형은 스승이나 한가지였던 셈. 성악을 전공한 누이에게선 음악을 배우고, 그림을 전공한 누나에겐 어깨너머로 화법을 전수받는 식이었다.

부안에서 태어나 서울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전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의 여정은 언제나 조용하고 담백했다.

그가 전주로 온 것은 1996년 가을. 그야말로 전주에 클래식기타의 문화를 심어보겠다는 열정 하나였다.

“그저 전주가 좋아 내려왔어요. 서울서 활동하는 것보다 몇 배 어려울 텐데도 각오했지요 뭐. 10여년 되니 이제 좀 먹히는 것 같아요. 연주자들도 인정해주고, 관객들도 찾아주고요.” 전문 연주인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을 당연시할 정도가 돼서야 그는 마음을 놓았다.

그 연유로 올해는 전북음악연구회 회장도 맡았다.

이제 멍석이 깔린 만큼 그는 전주에 클래식기타의 선율을 한껏 풀어놓겠다고 다짐한다.

“실상은 열악한대도 타지에 가면 전주를 다르게 봐요. 참 이상한 현상입니다.

이런 전주에 열과 성을 다해 기타문화를 심어보고 싶습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지요.” 재주꾼인 그가 왜 불모지와 같은 기타를 선택했을까? 모르긴 해도 그가 기타의 매력으로 꼽는 여백미학에 기인할 것이다.

음과 음 사이 공간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여백미에 빠져든다는 그. 그의 삶 역시 우연과 여백의 순환은 아니었는지…. 그의 인상이 기타 선율처럼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는다.

“이미 만난 지 오래돼 지워진 사람도 많고, 추억이 많아진 만큼 잊혀진 것도 많네요. 문득 자신이 텅 빈 우체통처럼 하나의 사연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아마 누구나 그럴 겁니다.

새롭게 누군가를 만나 모두의 우체통이 기뻐 빨갛게 웃었으면 합니다.” (웃음)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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