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7일 ‘완주지역 적대세력 사건’과 ‘무주 적대세력’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했다.

적대세력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점령시기와 퇴각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완주지역에서는 경찰 등 공무원과 우익인사 23명이, 무주에서는 대한청년단원과 국민회원 등 51~55명이 각각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가해 주체는 자위대원이나 내무서원, 빨치산, 정치보위부원을 포함한 지방좌익과 인민군으로 조사됐으며, 희생자 대부분은 이장이나 면장 등 공무원과 가족, 대한청년단, 국민회 간부 등 우익인사들로 확인됐다.

일부 사건에서는 심지어 일가족이 몰살되거나 어린이가 희생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조사는 진실화해위가 현재 생존해 있는 주민들의 진술과 6.25전쟁 이후 미군이 조사한 전쟁범죄 보고서인 KWC 문서, 부분적으로 이뤄진 법원 재판 판결문, 1952년 정부에서 조사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 등 문서 등을 바탕으로 조사됐다.

▲완주 우익인사 등 23명 희생 ‘완주지역 적대세력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완주 지역 우익인사와 공무원, 경찰 등 국·공립기관 근무자 등 23명이 인민군과 지방좌익, 빨치산 등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다.

이 사건 희생자 대부분은 30~40대 남성들로 의용소방대원, 면장, 형무관, 대한독립청년단 등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우익인사나 우익적 성향을 가진 단체 및 관련 인물들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완주군 이서면 희생자는 총살에 의해 사망했으며 나머지 희생자는 농기구 등으로 구타당해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희생자들의 사망시기와 장소로는 1950년 8월 3일 정몽룡씨는 이서면 사무소 창고에서, 김정봉씨와 이성노씨는 각각 9월 2일 이서초등학교 뒷산과 인민군 퇴각기인 9월 26일 조촌면 만성동 건지산에서 지방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흥섭씨 등 2명은 같은 해 9월 27일 조촌면 송천동 배암골에서, 서재봉씨 등 8명은 조촌면 성덕리 뒷산, 유갑상씨 등 4명은 비봉면 소농리 신복부락(마을) 분주소 뒷산 등 3곳에서 지방좌익에 의해 나란히 희생됐다.

이용기씨 등 3명은 다음날 봉동면 장기리 소방대 창고에서 지방좌익과 인민군에게 희생된 사실도 확인됐다.

아울러 이덕우씨 등 3명은 인민군이 퇴각한 1950년 12월 20~21일께 완주군 화산면 덕동부락 계곡에서 빨치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이에 따라 이들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사망 일시와 장소를 정정하고, 완주군지 등 각종 지역자료에 희생 당시의 지역사를 바르게 기술할 것을 권고했다.

▲무주서도 주민 55명 희생 ‘무주적대세력사건’은 1949년 2월 4일과 이듬해 9월 19일, 9월 26일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무주군 부남면 대유리와 가당리, 무주읍 용포리에서 빨치산과 내무서원에 의해 주민 51~55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무주군 부남면, 설천면, 무주읍, 안성면, 적상면 일대 마을 주민들로 이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면서 대한청년단장이나 대한청년단원, 의경, 국민회장, 국민회원, 대한부인회 등 다양한 사회·정치활동에 참여했고, 일부는 순경과 면장, 면서기 등 공무원으로 나타났다.

1949년 12월 4일 밤에서 새벽 사이 무주군 부남면에 내려온 빨치산들은 마을 주민들을 감금하고, 이들 중 대한청년단원과 대한부인회원을 가려내 10명을 피해자 집 앞과 마당에서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무주지역의 내무서원은 인민군 점령기인 1950년 9월 19일 감금된 대한청년단 총무와 동원부장을 무주내무서로 이송하던 중 도로변에서 총살했고, 인민군 후퇴시기였던 같은 달 26일에는 무주등기소 건물에서 심문을 받던 주민 44~48명을 하늘바위에서 총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조사결과 진실화해위는 유가족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들의 사망 날짜를 정정하고, 지역의 역사자료로 활용할 것을 권고했다.

/이강모기자 kangmo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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