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아름다움은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정신에 있다.”

“수학을 제외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야 하고 삶은 곧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실재를 전재 하여야만 한다”.경험론의 마지막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말이다. 이러한 흄의 실재는 정신과 일치할 것이다.

“사람이 정신이 없으면 모든 것은 허구이다. 하지만 고통은 증명할 수 있는 실재이다. ”

이것은 나의 말이다.
남 프랑스의 열정을 타고 난 곱추 화가 툴루즈 로트네크의 집요한 관심의 주제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변방의 사람들이었다.

고흐와 각별한 우정을 간직한 곳이기도 한 몽마르트의 언덕, 그리고 물랭루즈는 1889년 10월에 개장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종합 유흥지의 탄생은 상류층은 물론 일반 시민까지 이곳에 모이게 했다.

라운지 바, 무희들, 로트네크의 영감은 속악한 물랭루즈에서 꽃 피기 시작했다.

환락과 속악의 밤 풍경조차 로트네크에게는 생동하는 아름다움이었던 까닭이다.

로트네크의 ‘세탁부’라는 제목의 그림은 정면이 아니다.

그림 속의 그녀는 깊은 우수를 간직한 채 하나의 역동적인 우주이다.

그녀의 아픈 기억은 모델 카르망 고댕, 로자 라 루즈라는 이름으로 한 때 노래를 불렀던 여자이다.

노래를 통해 자신을 창녀로 자학했던 병약한 조용한 여자, 그녀의 정신적 고통을 로트네크는 간파했고 그런 소외된 사람들의 내면을 그렸다.

그리고 탁월했다.

 로트네크, 그의 운명은 어느 날 가혹하게 찾아 왔다.

예기치 않은 사고였다.

추락사고로 그의 성장은 멈추었고 그의 불구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어도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거야”라고 자조했던 그의 운명은 그를 가계로부터도 소외시킨 부친의 냉소함에서도 비롯되었다.

그녀는 창녀들의 일상을 그릴 때 더욱 영감에 빛을 발했다.

그의 그림은 대상을 미화하는 것보다 포착에 있었다.

시적 영감을 포착하듯.어쩌면 그의 그림은 평면적이어서 원화를 보면 포스터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의 그림이 관념이 아닌 탓일 게다.

파리로 입성한 시골뜨기였던 청년 피카소는 로트네크가 얼마나 위대한 화가였는지 알게 되었다고 편지로 고백하였다고 한다.

그는 실재의 삶은 어쩌면 가혹한 현실에 있음을, 그 길을 가는 변방의 사람들에게 있음을 간파했다.

 이해 할 수 있는 눈은 인과 관계의 틀, 경험에서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로트네크의 삶에 대한 연민은 예술이 있었기에 승화될 수 있었고 그의 삶의 철학은 존재의 영혼에 있음을 드러냈다.

아주 작은 도시에서 지금 그를 반추하며 사유하고 있는 나는 그를 통해 삶의 질곡에 서있는 사람들을 엿보며 아름다운 삶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정신에 있음을. 아름다움이란 어떤 판단의 경계에 있음이 아니고 자유로운 사유의 본질에 있음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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