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는 민주주의 기본 요소다.

자기의 주장과 표현의 통로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혹은 왜곡된 언로를 지니고 있는 사회일수록 민의의 주인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주장을 피력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시위요, 데모(demonstration)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활짝 개화한 나라치고 시위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시위하는 개인과 시위 공간으로서 광장과 도로를 개방하고 보호하지 않는 민주 선진국은 없다.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에게도 시위는 매우 치열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시위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정도의 민주 열매를 누릴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과거 10년 동안 이 나라는 온갖 시위로 몸살을 앓았으면서도 그 악명 높았던 군사 독재시절의 시위 저지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격렬한 시위로 공권력이 물러터졌다는 수구언론의 질타가 가혹할지라도 최루탄 사용이 전무했으며, 백골단 같은 공권력을 투입하는 시위 진압을 자제해왔다.

이는 우리나라가 민주 선진국으로 성장해 가는 데 필요한 권력의 성숙한 자세로 보아 환영했다.

그러던 우리나라가, 민주 선진국을 향하여 행보하던 공권력이 권력자가 바뀌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20년 전 독재시절로 회귀한 듯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저지한다.

든 것이라곤 촛불뿐인 시위대를 향하여 물대포를 쏘아대어 시위하던 시민을 실명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첨단 민의의 광장인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론 소통마저 통제하겠다고 나서더니, 드디어 시위대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기동 경찰력을 양성하고 있다고 하니, 옛날의 백골단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나 아닌가 섬뜩한 생각이 든다.

공권력은 시민의 손발을 묶어놓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권력은 국민의 입을 막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시위하는 시민이 적이 아니라 권력의 파트너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공권력, 시위하는 시민들의 주장이 나라의 주인이 머슴에게 향하는 질책임을 망각한 권력자의 오만 방자한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찔레의 새순이여/ 네가 가시로 무장한다 해도/ 결코 진딧물을 이기지 못하리/ 나는 진딧물 토벌군/ 내 너를 위해/ 새까맣게 달라붙은 놈들을 내리훑으며/ 대량 살상을 즐겨 주마/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땀/ 손끝에서 전해지는 이 짜릿한 살기/ 아, 절대권력이란 이토록 무도하고 황홀한 것인가/ 순간 내 손을 찌르는 찔레의 가시!(이승부의 ‘찔레’전문).” 말 한 마디로 물대포가 발사되는 이 짜릿한 고위층의 유쾌! 하룻밤 사이 21세기 서울 한 복판에 산성이 쌓여지는 이 찌릿한 권력자의 상쾌! 쓰러진 시민을 짓밟고 나아가는 공권력의 통쾌! 절대권력의 황홀한 마력에 빠진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대량살상을 즐기던 토벌군’이 찔레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듯이, 고위층의 유쾌한 사다리도 진실 앞에 무너지는 모래성이며, 권력자의 상쾌한 명령도 골짜기를 돌아서 되돌아오는 메아리이며, 공권력의 통쾌한 가학성도 결국은 처참한 피학적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는가? 절대권력은 절대 망했다고.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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