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주시 팔복동 작은 공간 작업장에서 올곧든 정신으로 조상의 얼이 숨쉬는 전통공예작품 세계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소병진 명장이
있다










“천년의 숨결에 또 다시 천년의 새 생명을 불어 넣는다.”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에 있는 작은 작업장에서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되살려 후손에 잇겠다는 정신하나로
전통공예작품 계승 발전에 매달린 소병진 명장(  )이 있다. 그는 천년의 숨결을 공유하는 이 시대 명장중의 최고의 명장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렵던 시절이 있었다. 완주군 용진면이 고향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지난 63년 전통공예에 입문, 평생토록 업(業)이 되어버린 소목장이가 되었다. 

이때부터 소 명장의 시련은 시작됐다. 자기 일을 스스로 3D 직종이라고
말하는 그는 힘든 일을 하다 보니 남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어렵고 힘 든 일이 닥쳐오면 그는 가족과 작품을 생각했다고 한다.
생활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 항상 곁에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아내 박경심 여사를 생각했고, 선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전통공예의 명맥을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소 명장은 “끼니를 거를 때가 다반사였으며 라면 한 봉지도 고마워
할 때가 어제일 같다”고 말할 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소 명장은 “가족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모진 고생을 이겨낼 수
없어 이 길을 접고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드는 가구장이로 변했을 것이다”며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해 주고 격려해 준 가족에 감사함을
표시했다.

특히 남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선조들의 삶과 영혼이 살아 숨쉬는 소목과 함께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온
소병진씨는 “40년간 오직 우리 전통공예를 연구해 우리 것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견디어 왔고 그러다 보니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 닥쳐도 작업을 하면 신이나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소 명장은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빵보다는 작품을 중요시 했다. 따라서 돈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배고픔 때문에 떠나는 후진들을 바라볼 때가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이제 경지에 들어선 그는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전통공예작품을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전통공예박물관을 건립하고 더 나아가 전통공예촌을 형성하여 후배양성에 평생을 바치는 게 꿈”이라고
밝혔다.

이런 각고의 고생 끝에 그는 가구 제작부분 국내 첫 최연소 명장이란 칭호와 10여년 연구 끝에 전주장을 재현, 전북 전통공예인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그의 다양한 수상경력이 그 동안 그의 살아온 갈을 짐작케 한다.
98년에는 제23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했고, 99년에는 전주시 예술상을 수상하는 등 수상경력이 다채롭다. 특히
2001년에는 제13회 중소기업주간을 맞아 국가 공예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에 대해 그는 “점차 소멸되어 가는 우리나라 전통공예 예술문화에
한층 더 이바지하고 전북공예의 육성 발전에 헌신하라는 격려로 알고 더욱 매진하겠다”고 덧붙였다.

광자진취(狂者進取). 미치도록 공방 일을 하던 자신의 과거를 돌이키며
스스로에게, 또 후배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려 주었던 좌우명이다.

그 는 한가지 일에 미치도록 몰두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고 말했다. 그 미치도록 했던 전통공예가 그를 지탱해온 힘이 되었다. 또 다시 천년의 숨결을 이어나가기 위해 오늘도 그는 작업장으로
향하고 있다. 작업장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는 어린시절 바라보던 아빠의 믿음 같은 든든함이 풍겨온다./김완수기자 kw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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