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 Q프로덕션 대표
 그의 적극성은 다소 육중한 몸짓만큼 과감하다.
마치 100%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늘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을 만날 때도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뭘 하든 열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매 순간 진화하는지도 모른다.
1970년 완주군 이서면 상계리 방앗간집 아들로 별다른 부러움 없이 태어난 그의 청년기는 거침 없었다.
뭐든 생각대로 움직였고 결실을 일궈냈다.
우석대 1학년, 보험업계에 뛰어든 것도 순전히 그런 배경이 작동한 탓이었다.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실적은 대단했지요. 전국을 석권했습니다.
보험이라는 것이 뭣인지 정체도 잘 몰랐던 터였으나 순전히 열정 하나가 무기였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요.” 보험업을 통해 배운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학업과 보험일을 함께 하던 그는 배짱도 두둑했다.
어려서부터 키워 온 영화제작자 꿈을 이루기 위해 이번엔 무작정 ‘프로덕션’을 세운다.
1997년 우석대 졸업과 동시에 이뤄진 일이었다.
“중학 선배가 영화 ‘공동경비구역’을 찍는다고 군산에 온 거예요. 자신의 꿈을 잊지 않고 실현하고 있는 선배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창업했지요 뭐.” 허나 지식은 물론이고 상식조차 없는 영화제작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잠시 생각을 멈춘 그는 방송광고제작으로 일단 선회한다.
허나 이 역시 속내를 모르다 보니 엔지니어에 늘 끌려 다녔고, 이를 극복하자고 진학한 ‘백제대 방송연예과’는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결국 상황이 악화돼 방송광고제작사는 접어야 했다.
브레이크 없는 그의 열정은 이듬해 12월 똑 같은 이름의 공연기획사를 만든다.
그 첫 주자가 대형가수 ‘나훈아’였다.
매진사태로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고, 공연은 시쳇말로 대박이었다.
나훈아로 힘을 얻은 그는 김경호 정경화 컬트삼총사 등 대형 뮤지션들을 줄줄이 무대에 세운다.
이 역시 모두 대박이었다.
“첫 공연을 너무 쉽게 봤던 게 오만이었습니다.
나훈아로 탄력을 받은 뒤로 한 해에 공연을 20여건이나 올리는 등 한동안은 잘 나갔지요. 자연스레 교만도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다 결국 IMF가 왔고, 공연기획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지요. 저라도 예외 있나요? 고전했지요.” 나훈아 조용필 조수미 하춘화 패티김 등 ‘스타 킬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3년 다시 한번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이 무렵 순수예술을 기치로 내걸고 개관한 ‘소리문화의전당’도 큰 벽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련은 몇 해 전 또 찾아왔다.
말하자면 세 번째 부도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섰고 오늘에 이른다.
100%를 사는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연 기획 12년째, 이젠 ‘코엑스 아트홀’ 제작이사로 사업가로 또 한번 재도약을 준비한다.
허나 체육진흥기금·문예진흥기금 폐지, 저작료 신설 등 10년 전과 비교하면 공연시장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또 ‘공연자법’이 바뀌어 돈만 있으면 공연을 유치한 뒤 치고 빠지기식으로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는 브레이크 없는 열정 하나로 극복하겠다고 벼른다.
세 번이나 쓰러진 경험도 있으니 두려울 게 뭐 있느냐고 큰 소리다.
기회 닿으면 예술을 소재로 한 다큐영화를 찍고 싶다는 그. ‘불혹(不惑)’ 즈음에 있으나 복고적 청춘물로 가득한 그의 삶이 부러운 이유다.
“정신이 번쩍 납니다. 뭐든 태풍 휘몰아치듯 열중하지 않으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들이 있지요. 창밖에 몸부림치는 풀도 100%를 살기 위해 미치기 직전 같아요. 다시 한번 균형감을 잃지 말고 열정의 화살을 쏴야지요. 잘 될 겁니다.”

/김영애기자 young@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