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봤음에도 음악가의 가슴은 따로 있음을 실감했다.

열심히 이야기하던 열정은 물론이고 진지한 태도가 보여주는 흡인력은 대단했다.

시조시인인 부친 박금규씨 영향이 컸을까? 그의 음악적 리듬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을 것이다.

비올리스트 박연주씨(40·전주시향 단원)의 연주인생은 부친이 지어준 이름으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연주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럴 즈음 만난 전주시향의 연주는 음악적 충격 그 자체였지요. 어렸음에도 뭘 알았는지…. 결국 제가 시향에 몸담고 있으니 꿈은 모두 이룬 셈입니다.” (웃음)

피아노 배우면서 재능 있다는 소리에 음악가 꿈을 키웠던 소녀.
누구라도 들었을 법한 흔한 얘기였으나 그는 흘려 듣지 않았다. 그리고 비올라를 선택한다.

협연악기에 불과했으나 그의 성격과도 잘 맞았다.

그러기를 20여년, 그는 결국 전주시향 ‘비올리스트’로 당당하게 그 값을 해낸다.

“무슨 일에든 배우는 자세로 임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아요. 무언가를 배우고자 할 때에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되기 때문이지요. 배움이란 나이 들수록 더욱 절실한 것이지도 몰라요. 흐르는 물처럼 낡은 지식은 흘려 보내고, 새로운 지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채워 마침내 큰 강으로 발전해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요. 음악가가 된 건 아무래도 그 결과지 싶습니다.”

그는 ‘지금 즉시 그 일을 하자’는 평소 지론대로 소신껏 꿈을 일궜다.

전주대 다니던 시절부터 전주 심포니에타 단원으로 활동했음은 물론 전주챔버오페스트라 조이오브쿼르텟 글로리아오케스트라까지 쉼없이 연주했고, 요청이 오면 절대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92년 꿈에 그리던 전주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출근하기에 이른다.

이후 대학원을 졸업하던 1994년엔 KBS신인음악회도 출연했고, 서울예술의전당·일본 가고시마현 초청무대도 섰다.

도립어린이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유스오케스트라 지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근엔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 단무장까지 거머쥐었다.

이렇게 거침없이 연주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복은 물론이고 남편복이 많았던 탓이었다.

결혼 전 적극적으로 부모 지지를 받았던 그의 행보는 결혼 이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순전히 배려해준 남편의 외조 덕분이었다.

거침없는 행보는 불혹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는 또 하나의 꿈을 꾼다.

이름하여 ‘클래식 전도사’. 열악해진 클래식 환경을 개선해보고자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그게 자신이 살 길이고 클래식 연주자들이 더불어 살아갈 길이라고 자신하는 연유.“클래식 시장이 너무 침체됐어요. 10여 년 전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지도자의 위치에 서고 보니 해야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요. 연주도 해야 하고 지도도 물론이고요. 클래식을 알리는 데도 나서야 하고요. 누가 뭐라 해도 사회에 꼭 필요한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부친 덕분인지 그를 비롯해 삼형제 모두 예술가를 자처한다.

여동생 박달님씨는 가야금 연주자로, 남동생 박태건씨는 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조 밭에서 감성을 키워온 박씨는 자신에 대해 한시도 느슨하지 않는다.

성공을 위해 감성을 곧추세우는 것이다.

“뼈처럼 하얀 빛이 쏟아지는 시간, 매 순간마다 삶의 기쁨과 깨달음을 놓치지 않고 알차게 보내고 싶은 시간입니다.

호기심·성실·계산감각·목적의식·마음의 여유는 성공을 위한 5계명이라고 생각해요. 시행착오도 자신을 연마하는 덴 아주 유용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일을 위해선 부족한 점은 뭔지 잘 살피고 보완해가야겠지요.” 부친은 음악교사를 원했으나 음악가가 됐던 그…. 강단에 서보니 역시 연주체질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그…. 중간 매개역할에 그치는 ‘비올라’였으나 인생에 있어 많은 교훈을 선물했다고 믿는 그…. 목에 상흔이 생길 정도로 비올라와 씨름했던 그가 이제 다시 한번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고래 뱃속을 탈출하자는 또 다른 계산에서다.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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