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들여다보면 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한편의 소설이다.

들여다볼수록 삶의 녹록치 않은 고행이 예사롭지 않을 뿐 아니라 각자 추구하는 행복의 농도가 어찌 그리 다른지 알 수 있다.

그 안에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그 긴 여정을 가는 것이 삶이다.

행복하다 한들 꿈결처럼 스러지고 마는 것을, 그래서 삶은 한 순간의 절정일 뿐이라는 허구가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허구 같은 감정의 희로애락과 함께하는 것이 삶이다.

수 많은 비평가와 예술가들이 경탄했다는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신곡이라는 책에 담았던 것 같다.

작은 한 사람의 사랑의 힘이 자라면서 인류애적으로 승화하면서 이토록 커다란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단테는 1304경부터 신곡을 구상했으며 지옥과 연옥에 이어 죽기 전까지 천국편을 집필했다.

단테는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으며 야심과 탐욕, 오만을 상징하는 표범과 사자, 암늑대와 맞닥뜨리는 자신을 상상하며 신곡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어두운 숲은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삶일 것이다.

단테가 신곡을 쓰게 된 배경에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무침이 있다.

스물네 살의 나이로 죽은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단테는 피안의 여정을 시작하고 단테의 절명위기에 나타나는 베르길리우스는 “베아트리체의 눈물어린 기도로 너에게 왔다”라고 하면서 두 사람의 여행이 시작된다.

제 9지옥으로 연결된 그곳에는 죄질에 따라 벌을 받고 있는 곳이다.

죄의 유형으로는 태만,애욕, 낭비, 분노, 교만, 탐식, 인색 등등인데 그 중에서도 자기를 믿는 사람을 기만했던 자들은 지옥의 맨 밑바닥에서 제일 중한 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단테는 강도와 살인보다 믿은 사람의 배신이라는 ‘기만’을 더한 중벌로 여긴 것이다.

  단테는 꿈을 꾸고 상상을 하며 만나는 영혼들을 통해 자신을 뒤돌아본다.

그래서 그의 세계는 매우 일상적이다.

하느님마저도 하나의 등장인물로 등장시킨 신곡을 통해 단테는 구원을 찾아 여행한다.

진실로 잘 사는 삶을 정의 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지옥과 연옥, 천국을 지나면서 과연 나는 어느 곳을 지나게 할 것인가? 위대한 단테는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인류의 길잡이가 되려 했던 것 같다.

영혼불멸의 신과 나약한 인간과의 소통을 찾으려 했던 단테, 그 첫 걸음은 ‘사랑의 힘’이었고 삶에 대한 의지로 순례는 출발한다.

홀로 살아 갈 수 없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늘 상대성 속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단테는 제일 중한 벌로 ‘믿은 사람에 대한 기만’을 택했을 것이다.

상대성 속에서 사랑에 대한 자신의 지향은 그를 곧 천국으로의 초대다.

그리하여 사랑의 힘은 넓고 넓어지며 그 안에 고통을 넘어서며 커다란 인류애로 자란다는 것이다.

이것은 끼리끼리 나누는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으로의 인류애라는 관점으로 위대한 단테의 삶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꿈꿀 수 있는지,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삶을 들여다 본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