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만나고 화두와 함께 걷고 나름의 화두의 답을 발견하고 놀라며 화두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습속이 지배하는 것들과 통치하고 명령하는 것들로부터 새롭게 새로운 사상을 만나는 것은 늘 화두와 홀로 있음의 시간으로부터 가능하지 않았을까.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원론의 강박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좋다, 나쁘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늘 선택이라는 괴로움 속으로 이끌곤 하였다.

그 사이 사이 수많은 지층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내면세계에도 수많은 지층이 있어 자기 탐사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찔하다.

결국 수많은 지층을 탐사하는 탐사자는 이후 대단한 자유정신의 소유자로 자랄 것이다.

니체는 스핑크스 눈을 빌어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낸다(스핑크스는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수수께끼를 낸 괴물이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라는 것이다.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 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의무이고 명령이며 우리의 눈은 훈련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의 투시주의는 이렇게 이해한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는 다양한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과잉은 소멸을 의미한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길의 미로가 아니겠는가라고. 이것은 가치 생성으로의 길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자신을 찾는 것과 동시에 진리로 가는 것은 결국 카오스로부터의 인식, 출발이 아닐까라고. 그러니까 그 무엇의 해석자로서 개인의 출발은 한결같이 창조하는 존재이라는 것이다.

가치를 찾아 탐사하는 자는 창조하고 있는 자라는 것이다.

탐사하고 해석하려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창조이고 생성이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긍정과 생성으로의 관점을 놓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투시와 탐사로 받아들인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어느 시점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 사춘기부터 사람은 늘 화두로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늘 나는 알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알려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서 출발하기에 바로 카오스이다.

그렇다 나는 늘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 알아야 했던 것이다.

안다는 것이 바늘 끝도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부끄럽고 알아가는 것이 또한 설레임이다.

어쨌거나 니체는 생성으로의 삶을 지향했고 이 부분이 내가 니체를 사랑하는 부분인 것 같다.

다양성이 아주 많은 세계 속의 나는 늘 탐사하는 여행자이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수 많은 것들이 있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나는 여행자라는 것, 그것이 나를 삶으로 이끄는 중요한 한 부분이기도 하다.

기독교 집안의 목사 아들로 자란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것은 진정한 신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성 상실인 것인 것처럼, 진정한 신은 인간과 매우 유관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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