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이 나이를 먹고 나서야 늦철이 들어 지각생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앞서가는 무리의 뒤끝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추월 당할 걱정이 없어서 여유롭고 누구를 따라잡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느긋해서 좋다.

이제 무슨 일을 한들 지각은 면할 수 없을 터, 기꺼이 지각생이 되어 즐기며 그 길을 갈 것이다(‘만년지각생의 이야기’중 후반부).” 이 얼마나 즐거운 느긋함인가. 늦깎이의 여유를 이토록 한가하게 보여준 예는 익히 없었던 것 같다.

수필가 최재범씨(73). 그의 글은 따뜻하고 편안한데다 찰지기가 입에 척척 엉길 정도다.

푸근하고 넉넉하기는 딱 엄마 품 안이다.

그의 수필집 ‘내 안의 나를 찾아서(클럽디자인 刊)’는 사유의 고향을 찾아가는 그리움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뽑혔던 소녀, 막연하나마 평생 글만 쓰면서 사는 삶을 동경했던 소녀가 끝내 꿈을 이룬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남편 서양화가 백준기씨가 표지화를 그렸고, 사진작가인 시동생 백범기씨가 사진을 찍고, 장남 백석종 교수(전주대 건축과)는 책을 디자인하느라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함으로 온 가족이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50여편을 5부로 나눠 각부마다 고르게 10편씩을 엮어놓았다.

이는 편집상의 체제보다 무슨 일이나 들쭉날쭉을 싫어하고 가지런히 가다듬기 좋아하는 그의 성미에서 비롯됐음으로 지인들은 해석한다.

교직생활 40여 년. 그에게 ‘글쓰기’는 늘 다하지 못한 숙제였다.

그 숙제 보따리에 매달려 맺고 풀기를 10여 년, 드디어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 삶의 편린들은 한 꼭지씩 삽화로 들앉는다.

그 편린들은 너무도 정직해서 그의 심안을 훤히 들여다보고도 남음이 있다.

그뿐 인가. 49세 방송통신대 입학, 은퇴후 컴퓨터에 운전면허증까지 도전할 정도로 단단한 열정도 눈에 띈다.

그가 면허증을 따가지고 오던 날 했던 남편 얘기는 웃음보를 자극하는 대목. “당신은 독종이야. 식구 중에 대학 안 나온 사람 하나 없고, 컴퓨터 못하는 사람 하나 없고, 운전 못하는 사람 하나 없는 집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는 또한 황소걸음 같이 걸으면서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교훈을 실천하는 면모에 다름 아니다.

자서를 통해 높은 문학성과 철학성에 이르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도 같은 맥락. 수필집조차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라고 밝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의 인생에 있어 ‘숙제’는 끝이 없을 모양이다.

“인간의 두뇌를 무색케 하는 문명의 이기가 많지만 안경이 없다면 우주선을 소유한들 무슨 소용이랴. 안경 덕에 이 만큼 밝은 세상에 살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이제는 흐려진 심안에도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겠다(‘마음의 눈’ 중 일부).” 심안에도 도수를 높여야겠다는 이. 자랑이나 거짓이 없으며 꾸밈도 없다.

그런 연유인지 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한편의 잘 그려진 삽화처럼 감칠맛이 넘친다.

소재도 어쩌면 그리 다양한가? 화력 40년의 남편과 더불어 나눠온 그림이야기며 고향이며 자연, 여행 등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다.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난 최씨. 1970년 동아일보 주부백일장 장원으로 문단에 들어선 그는 2005년 현대문예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일단 ‘숙제’는 끝낸 셈이다.

아니 다시 숙제가 시작된 격이었다.

한 권의 책을 엮고 난 뒤에도 되돌아보니 걸어온 길이 아득하다는 그. 그는 다시 새 길을 찾아 허위허위 나선다.

‘내 안의 나를 찾아서’는 출발을 위한 마무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수려한 풍광에 한눈 팔 틈 없이 그는 남기고 온 발자국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또 한번 여정을 꾸린다.

/김영애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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