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만화를 못 읽게 해봐야 소용없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마 비디오를 볼 것이다.

비디오를 못 보게 하면 아이들은 이번에는 전자오락기에 빠져 들 것이다.

정말이지 상업적으로 대중화된 정보매체들은 엄청나게 다양한 까닭에 아이들에게 혹은 어른들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접근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앞서 교육개발원이 전국의 초중고생 2천여 명을 대상으로 성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가 자못 충격적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남녀 고교생 4명 중 3명꼴로 음란 비디오를 본 경험이 있으며, 4명 중 1명꼴로 그 비디오에서 본대로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또 남자 중고생 5명 중 2명 정도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가벼운 성추행을 해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짐작컨대 이들에게 “음란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미리 어떤 시범을 보여주고 조사를 실시한 것은 아닐 터이니 아이들의 이러한 경험 폭을 당장 범죄성의 포르노와 연관시킬 정도는 아닐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성적 함의를 띤 말들을 일상적으로 아주 폭넓게 쓴다.

야하다.

저질스럽다.

잘 빠졌다.

섹시하다 등등 어른들이 함부로 썼다가는 영락없이 성희롱으로 문책 당할 만한 말들을 아이들은 다반사로 쓰고 있다.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물론 부모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혼란은 개방이니 다원주의니 하는 미명하에 범람하는 대중정보의 마력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의식조사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나라이자 경계해야할 나라로 청소년들이 일본을 첫 번째로 꼽는 것도 결국 우리 아이들이 일본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상업적 정보기술 매체에 그만큼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음란과 음란이 아닌 것도 경계를 긋는 일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표현물에는 애정의 감정을 일으키는 차원이 있는가하면 은밀한 성적 흥분이나 자극을 일으키는 차원이 있고 이를 넘어서서 성적 혐오감과 수치심을 일으키는 차원이 있다.

형법에서 반사회적인 행위로서 금하는 이른바 음란물은 이 중에서 마지막 차원의 성표현물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각각의 성 표현들의 구별경계가 현실에서 점점 무너져버린다는데 있다.

오늘날 성은 흡사 수도꼭지를 비틀기만 하면 흘러나오는 물처럼 손만 대면 어디서건 쉽게 접할 수 있다.

다양한 상업적 대중정보망을 타고 기왕이면 더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택하시라는 식으로 성을 자극적으로 포장하는 이 시대의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음란과 비 음란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고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정상과 변태의 구별을 모호하게 한다.

성이 이렇게 일상에서 흐느적거리는데 비해 성을 대하는 법이나 윤리의 태도는 경직성 그 자체로 머물러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 청소년들 4명 중 3명이 지금까지의 법의 잣대로 보아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에 비추어 공연히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시키고, 보통 사람의 성적 수치심을 해하는 것이어서 건전한 성풍속이나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들에 접근해 갔다면 청소년의 성문제는 이제 더 이상 처벌이나 억제만이 능사가 아닐 지도 모른다.

또한 성문제는 더 이상 도덕적 관념에만 비추어 판단할 수 없는 문제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제재가 아닌 다른 실천적 대안을 위한 그리고 도덕적 주장이 설득력을 잃은 자리를 메우기 위한 진지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에 관한 윤리적 접근의 한계를 지적한다하여 성적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차제에 말하고 싶은 것은 성문제는 이제 너무도 복잡한 사회현상이 되어버린 까닭에 단순히 법과 도덕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접근법만으로는 제대로 포착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윤리적 관심에 집중하여 섣부른 당위적 해결을 구하려는 나머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마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성적 진상을 제대로 담기 위한 새로운 규범들을 짜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것은 어떤 방향일까? 스웨덴 식으로 가게 될까? 미국식일까? 일본식일까? 아니면 성을 통해 우리의 문화적 긍지를 살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일까? 이를 위해 싫든 좋든 성은 이제 보다 공식적인 토론의 주제로 올라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성배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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