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춥다.

춥지 않으면 겨울이 아니다.

추워서 즐거운 이들은 좋겠다.

백설이 분분한 산마루에서 하얀 눈보라를 흩뿌리며 달려 내려가는 스키의 참맛도 추워야 제격이다.

바람을 가르며, 추위를 쳐부수며, 겨울을 물리치는 스키 용사들은 보기만 해도 시원해서 따뜻하다.

겨울은 춥다.

춥지 않으면 겨울이 아니다.

김이 모락모락 이는 노천온천장에 들어앉아 흩날리는 눈꽃이나 바람자락을 음미하며 즐기는 온천욕. 세상은 영하권으로 얼어붙었는데도 추위를 즐길 수 있는 이들은 좋겠다.

다복한 이들의 겨울나기는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

겨울에 오히려 삶의 여유를 즐기는 이들에게 추위는 축복이다.

그러나 추위가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전주곡인 사람들에겐 겨울나기는 힘겨운 전쟁이자, 생사를 가르는 피눈물 나는 싸움이다.

겨울은, 이 시대의 추위는 더욱 그렇다.

생명선인 일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고공철탑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 찬바람 소란스러운 차도에서 노동가를 틀어놓고 자본권력과 싸우는 건설노동조합원들, 사람의 길을 바르게 가라고 가르쳤대서 교단에서 쫓겨난 선생님들, 힘없는 촛불로 거대한 공권력과 맞서다가 공공의 적이 된 선량한 시민들, 한 철 농사 끝에 얻는 수확의 기쁨 대신 농협에서 융자 받은 영농자금 상환하라는 독촉장만 손에 쥔 농민들, 포장마차에 온 가족의 생계를 담아 거리마다 골목마다 밤을 지새우는 생계형 행상들, 신문지를 담요 삼고 포장박스를 금침 삼아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 이들에게 겨울은 가혹한 독재자요, 추위는 살육의 흉기가 아닐 수 없다.

겨울 스키를 타러 가듯 권력과 재력의 상층부로 곤돌라를 타고 올라만 가는 이들에게는 도무지 실감이 가지 않을 혹독한 겨울독재는 언제쯤이나 끝날 것인가?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자위하고 말 것인가? 굴뚝 없는 냉방에 냉소의 군불이나 퍼지르며 시대의 불운을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혹독하기만 한 시대의 겨울, 영하의 독재는 오늘도 인간 사이에 불통의 고드름만 피우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냉소의 터널만 뚫으려 한다.

“나비물/ 뿌렸다고/ 마른 땅 젖었으랴/ 바람 눈물/ 안개비로/ 젖은 땅 깊었으랴// 사랑은/ 받는 이 느낄 때까지/ 이어져야/ 하는 짓(김계식 ‘사랑 잇기; 전문).” 가난한 과부의 헌금 한 냥이 부자가 바친 기부금 백 냥보다 많다.

참 엉터리 셈법이지만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절묘한 가르침이다.

과부의 한 냥은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이어서 이것은 과부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면, 부자의 백 냥은 자기가 가진 것의 극히 일부여서 이것은 있으나마나한 부자의 재산 일부분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최고의 봉헌은 목숨이다.

성자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바칠 수는 없는 것. 그것은 바로 가난한 과부처럼, 사랑의 행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짓(행위)의 바탕에는 온전히-완전히-all in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 시대가 역류하고 있다.

사회의 체감온도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시대를 덥혀서 사랑의 체감온도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난방연료로 사랑만한 것이 또 무엇이랴! 사랑 받는 이의 체감 온도계가 뜨거워서 즐거운 비명을 지를 때까지, 사랑이라는 질 좋은 연료로 군불을 피우자. 촛불을 밝히자.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