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 문득 떠오르는 개념들을 종이에 적어 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정의감’, 정의롭다, 라는 개념도 몇 개의 단어 중에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 중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정의’라는 것이 속해 있다는 뜻이었다.

이후 나는 많은 경험 속에서 정의로움에 대해 적나라하게거나 아니면 소극적이었다 할지라도 경험을 갖게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까 나는 삶에서 ‘정의’를 귀한 덕목으로 올려놓았었다는 것인데 스무 살 그 무렵 나는 고리키의 어머니라는 책을 읽었고 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 건지 나름 정의를 내리고 있을 때였고 우리에게 사회적 정의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요는 정의라는 용어처럼 보편적 합의가 어려운 용어도 없을 듯하다.

정의에 대해 20세기 철학자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이라는 비유가 말해 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공정한 입장을 갖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큰 틀의 사회 정의는 자기 내면으로부터 출발이기에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들어 가보면 더욱 미묘할 것이다.

누군가가 무지의 상태에서의 사회정의를 외친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망상으로 자유로운 다른 가치의 위협으로 본 폰 프리드리히하이에크의 말처럼 이처럼 어려운 정의라는 개념은 그리스 철학자로부터 고민한 문제이다.

플라톤은 정의를 지혜, 용기, 절제를 통합으로 4원덕으로 보며 이를 국가차원으로 확대하기도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덕의 중용으로도 보기도 하였다.

한 때 정의롭기를 꿈꾸었던 한 소녀가 중년의 나이가 될 무렵 문득 나의 정의와 타인의 정의에 대해 검증하며 자신의 정의가 사회적 정의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검증을 통해 내부와 외부의 무지의 장막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듯 지독한 객관성을 갖는 정의는 사회적 정의로서 조금이나마 타당할 것이다.

  “기층민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는 전체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떤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해석하며 몸소 쿠바의 주체적인 혁명을 주도했던 ‘체 게바라’야말로 행동으로 정의를 보여준 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수단이 비열하다면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그의 말처럼 지극히 객관적인 자기 검증의 필요성이다.

목적지향주의가 판치는 오늘날, 목적을 위해서 과정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것이야 말로 무지의 장막이 아닐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지, 진정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아니, 그런 무지의 장막에서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 정의를 갖게 될 수 있는지의 진정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며칠간의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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