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텃밭을 일구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은 풀 때문에 키우지 못 할 거란 것이었다. 씨를 뿌리고 바위도 녹인다는 비가 오고 텃밭에 나가니 풀이 가득 하였다. 내가 원래 심은 것은 풀이 아니었으니 어디서 날아 든지 모르는 풀을 하나 둘 뽑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많은 경험 중에 인간과의 경험을 제일 나중에야 시작 했다. 자연과의 교감을 체화하며 자란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혼자 노는 법을 일찍 터득하였으나 인간관계나 사회성에 대해서는 늘 미숙하였다. 사람보다는 정체성이 더 일찍 궁금한 탓도 있었겠고 성향일 수도 있지만 자연과 책이면 족했을 삶이었을 터, 허나 인간을 향한 깊은 애정이 없다면 살아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형이상학의 이상을 갖지만 형이하학의 삶을 사랑한다. 부족하고 초라할 지라도 자신의 발로 딛고 자신의 발로 걷는 삶, 누구의 삶이든 참 소중하리라. 풀을 뽑으며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 떠오른 건 내 삶의 바오밥나무에 대한 혜안을 갖기를 늘 사유하며 묵상했기 때문이다.

  “사흘째 되는 날, 주인공은 어린왕자가 사는 별에 거대한 바오밥나무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 별의 땅에는 온통 바오밥나무 씨앗투성이였다. 그런데 그 바오밥나무는 자칫 늦게 손을 쓰면 별을 온통 휩싸게 자라 뿌리로 별에 구멍을 뚫는다. 작은 별에 바오밥나무가 너무 자라면 그 별을 산산조각나 버린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장미와 비슷한 그 바오밥나무를 귀찮지만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의 별은 ‘나’의 세계이다. 내 안에 날아든 바오밥나무를 뽑지 않으면 ‘나’라는 별은 산산조각이 날것이다라고 바꾸어 생각하였다.

  참 희한한 일은 어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삶과 살아가는 삶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니까 말은 옳은 소리를 다 하지만 정작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연휴를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습에 따라 살고 있음이다. 자신이 살아 온 삶이 자신을 끌고 가는 수레가 된 것이다. 그 습을 벗는 용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관성의 법칙으로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습’이다. 그 나쁜 습은 내 안의 바오밥나무이다. 그것을 뽑는 일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일, 일생이 되는 하루하루가 습을 만든다. 그래서 바오밥나무 어린 풀을 뽑아내야 하는 정신의 성찰이다. 어린왕자의 작가 셍떽쥐베리는 말한다. ‘어린이들아. 바오밥나무를 조심하라.’

  오, 바오밥나무가 자라 그대 혜안의 어둔 길이 되지 않기를! 나는 속으로 외쳤다. 열아홉이 되었을 때 내게로 온 책 한권, 어린왕자, 사막의 우물처럼 환한 길이 되어줬던 책, 그런 기억 탓에 어른이 되어 다시 고전을 읽기 시작하며 아, 동심처럼 순수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갈망했던 적이 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어른의 눈과,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어른의 귀와,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어른의 혀, 대장장이가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연장처럼 나도 다시 순결한 눈과 귀와 혀를 가졌으면, 어른이 되어 읽은 어린왕자는 내 눈가를 촉촉하게 했다. 바오밥나무! 어른들은 어쩌면 자기 안에 무성한 바오밥나무 틈에서 진정한 자기가 뿌리려 했던 장미를 알아내기나 하는 건지! 난생처음 몇 평의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은 고요함과ㅣ 적막함을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내 귀안에 여리고 어린 식물들의 숨소리가 씨앗처럼 슬게 하고 싶은 탓이다. 해지는 무렵을 좋아해서 슬플 때면 해지는 것을 바라보는 어린왕자, 내 안에 사는 자귀나무 곁으로 어린왕자가 지나가며 나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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