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들러 책을 훑어보다가 책 표지에 적힌 어떤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 할 것이다.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는 글귀인데 공감이 크게 느껴졌다. 사실 요즘 며칠 동안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묵상하면서 여행 중에 보았던 미케란젤로의 피에타의 작품과 최근에 보았던 그림으로 본 나머지의 작품인 ’피에타‘가 음영을 이루는 파도처럼 내 가슴에 남아 그림자를 이루며 특별한 감흥으로 나를 흔들었다.

  ‘피에타’는 ‘연민’으로 번역되는 정도라 한다. 가톨릭에서는 ‘궁율히 여기다’ 정도이고 불교에서는 ‘대자배비’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고도 한다. 번역된 뜻 또한 내게 특별했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라는 제목으로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 네 점을 제작했다. 한 점은 바티칸에, 두 점은 피렌체에, 한 점은 밀라노에 소장되어 있다는데 막 무너질 듯한 예수를 성모가 뒤에서 부축이는 형상은 노년에 이르러 같은 주제를 잡고 제작했다고 한다.

  노년에 만든 피에타의 작품은 가히 놀라웠다. 인간의 최고 정점 ‘선’을 끌어내는 모습이었다. 25세 때 만들었다는 첫 번째 ‘피에타’도 아주 감동적이었었지만 느낌은 달랐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피에타는 성모의 무릎위에 누워있는 예수인데 이후로의 피에타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져 나중의 작품은 거의 일어서며 쓰러질 듯한 모습의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를 간신히 부축이는 성모의 모습인데 뭐라 말 할 수 없는 고뇌의 충만이 차올랐다. 작품의 주제인즉 ‘죽은 예수를 안아 일으키는 성모마리아’ 라니, 삶에 연민을 가득 불러냈다.

  어릴 적 본 모습 중에 할머니의 모습이 있다. 키 크고 잘생긴 삼촌은 육사를 나와 장교로 근무하다가 부하의 부주의로 총에 맞아 돌아가셨는데 막 결혼한 삼촌의 죽음은 평생의 우리 가족의 아픔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할머니는 둑으로 나가 삼촌을 부르며 울부짖었던 모습. 사업에 실패한 뒤 풀죽은 아버지의 일어서는 미묘한 뒷모습의 감흥, 어느 때는 막연히 삶이 두렵고 무서웠다. 첫 딸이어서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해야 했기에 앞으로 내딛는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려움과 용기로 내면에서 치열했다.

  그래서 늘 기적같이 일어서 한 발 내딛는 자신이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지만 혹여 난 늘 혼자 일어서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던 건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욱 혼자 일어서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자기연민이 이토록 강해져 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나를 부축이며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아무에게도 원하는 것 없이, 헛된 기대 없이, 누구에게 의존하는 맘 없이, 갚아야 할 마음의 빛도 없이, 가진 것 없이, 자랑할 것도 없이 자유롭게 혼자 걷는 삶, 살아 온 것처럼 살아 갈 것이고 그래도 아직 꿈이 많으니 조금은 괴롭지만 나를 이끌 것이며 포기하지 많을 것이다.

  죽은 예수를 부축이는 성모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다. 고뇌와 고통과 슬픔과 사랑, 자신과 서로를 치유하는 연민, 뭐라 말하리. 결국 저 아름다운 모습 탓으로 이리 가슴이 오랫동안 절절했나보다. 저렇게 살고 싶다. 저렇게 아름답게, 죽음도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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