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내밀며  여름이 무성하다 지치자 아침저녁으로 가을 기운이 손을 내민다.

어디 영원한 것이 있으랴. 내미는 손길 뿌리칠 수 있는, 저만의 고집 그대로 가져가도 좋을 불변하는 계절이 어디 있으랴. 모두가 시절의 인연으로 내미는 손 덥석 잡고 서정의 넝쿨을 벋거나, 혹은 냉정하게 뿌리치고 자신의 살 속으로 고독의 뿌리를 벋으며 사는 것처럼 죽어갈 따름이 아닌가. 가을이 저만치에서 그 삽상한 자신의 됨됨이로 손을 내민다.

그리 서두를 일은 아니로되, 그리 방관한 채 평안할 수 없어 한 계절의 뜻이 깊구나. 키만 자라 허약한 열대성 관상식물 파키라의 몸이 부실하다.

줄기에서 웃자라 오른 가녀린 가지가 보기에 민망하다.

독한 맘을 먹고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고 조금 방치해 두는 것도 그를 사랑하는 한 방법일 수 있으리라. 며칠 지나자 잘라낸 줄기 끝에서 앙증맞은 새순이 마치 내 무정했던 단절의 버림을 질책이라도 하듯이 푸른 손을 예쁘게 내민다.

잘라내기 전보다 더욱 기운차게 날마다 내미는 새로운 손길이 정겹다.

때로는 싱그러운 삶을 위해, 새로운 손을 내밀기 위해 냉정하게 버려야 하는 것도 사랑의 한 길이 될 수 있는가? 잘라내도 더 잘 자라는 파키라의 놀라운 생명력의 뜻이 깊구나. 쌈지공원의 관상식물들은 누군가 돌본다.

나쁜 벌레도 물리치고, 악성 병원균도 소독하며 사람의 눈길을 위해 나무 돌봄에 공을 들인다.

쌈지공원의 천덕꾸러기는 단연 잡초라는 이름의 풀들이다.

어디 풀들에 이름이 없을까, 잡초라니? 그래도 공원의 풀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잃고 도매금으로 잡초라는 이름으로 버려진다.

때때로 잡초들은 수난을 당한다.

관상용 나무들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를 즐기는 사람들의 편향된 눈길에 영합하기 위하여, 풀들은 잡초라는 불가촉천민의 신세가 되어 여지없이 베어진다.

그럴 때마다, 버려질 때마다, 베어질 때마다 풀들이 한 번도 제 스스로 투항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풀들은 합세하여 베어지기 전보다 더욱 기운차게 일제히 항거의 손길을 내민다.

쌈지공원의 일원으로서, 관상식물의 품위에 도전이라도 하듯이 풀들의 저항은 거대한 녹색의 함성이 되어 당당하게 쌈지공원에 상주한다.

저들, 저 푸른 넋들이 내미는 손길을 누가 있어 정녕 뿌리칠 수 있으랴. 잡초라는 이름이 지닌 끈질긴 저항의 손길에 뜻이 깊구나.   <누군가 한 사람 창가에 앉아/ 울먹이고 있다/ 햇빛이 스러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한 번 가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야만 한다고/ 그 곳은 아주 먼 곳이라고/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고 있다/ 잠시만 더 나와 함께 여기/ 머물다 갈 수는 없나요/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어 손을 내밀었을 때/ 이미 그의 손은 보이지 않았다>(나태주「시간」전문『올해최고의시』시선사)   보이는 손길을 잡을 수 있어야 보이지 않는 손길도 놓치지 않으리. 내 삶의 창가에, 내 사유의 뜨락에 무시로 찾아와 손을 내미는 이여, 감성이라는 이름의 계절로 오는 연정이거나, 열대성 연정으로 웃자라는 열정이거나, 혹은 잡초라는 이름표를 달고 무성하게 내미는 유혹일지라도 내미는 손길 함부로 뿌리치지는 말 일이다.

푸르른 계절의 손, 기운찬 생명의 손, 무성한 저항의 손길을 잡아줄 수 있을 때, 품위를 가장한 거짓 평안에 길들인 내 삶의 정원에도 비로소 삶의 찬가가 나무처럼 서게 되리라. 내미는 손길 마주 잡을 때 한 번뿐인 시간의 강 뜻 깊게 건널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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