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시대 20대 때부터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운명을 달리한 무명 의병의 뜻이 100년만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부안 상서면 출신으로 1909년부터 의병장 이용서의 부대에 가담 의병 30여명과 함께 고부.부안.태인 등지를 근거지로 활동한 김낙진 의병(1881~1925)의 뜻을 기리기 위한 기적비(紀跡碑)가 의병의 고향 인근에 세워졌다.

김낙진 의사의 기적비 준공식은 지난 20일 유족과 추모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양규태) 회원과 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서면 감교리 장밭들(타루비 옆)에서 열렸다.

김 의병은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3월 28세때 태인군 남촌면 일대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중 허벅지에 총상을 입으면서 기구한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이날 총상을 입은 김 의병은 탈출에 성공해 은신하며 치료해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총상에도 불구하고 4개월 후인 같은 해 7월 의병 12명을 규합 선봉장이 돼 부안.고부.정읍.태인.김제 지역에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해 큰고 작은 공을 세웠다.

김 의병은 이때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을 우려한 나머지 총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총 8정과 칼 1자루의 보잘것 없는 무기로 유격전을 벌였다.

다시 한 달 뒤 출전한 김 의병은 김제군 홍산면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중 또 다시 총상을 입고 체포 구금돼 큰뜻을 뒤로해야 했다.

그는 급기야 11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그외에도 그는 1909년 초부터 체포된 8월까지 수 십 차례 출병하면서 큰 전과를 거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의병은 1916년 11월 총상과 고문에 만신창이 몸으로 7년형을 모두 채우고 출옥됐지만, 이미 고국은 일본의 손에 넘어간 후여서 그의 험난한 항일활동을 예고했다.

비록 소도시 지역에서 이루어진 항일활동이었지만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던 김 의병은 1925년 4월 총상과 고문 후유증을 못 이겨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항일활동으로 운명을 달리한 김 의병에게는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한장 남아 있는 것이 없다.

6년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김 의병은 이미 추서된 훈장과 호적명이 아닌 '김낙선'이란 이름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날 기적비로 그의 뜻을 기리게 됐다.

김 의병에게 주어진 포상은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자료 심사위원회에서 공적 심사 결과 서훈이 결정돼 1986년 12월16일 건국포장이, 1990 12월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 같은 항일활동이 인정된 김 의사는 2003년 5월20일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해 안장됐다.

이날 세워진 기적비는 2004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200여㎡ 부지를 매입, 전북도와 부안군 지원으로 세우게 됐고 앞으로 국비를 확보하는데로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식전행사인 터다짐 풍물굿, 추모제사에 이어 2부 준공기념 행사 및 추모 공연으로 이뤄졌으며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님의 뜻을 기렸다.

김호수 부안군수는 "김 의사 추모비가 100년만에 세워져 우리 고장에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념물을 갖게 됐다"며 "호국충열의 역사적 현장으로 가꾸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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