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고-선충사-화산서원-유연대-화산정-서신동 롯데아파트

아침부터 추적추적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난다.

학교 소풍가는 날, 운동회 하는 날 비가 오면 학교 수위아저씨가 뱀을 죽여서 비가 온다는 둥, 학교 터가 무덤이었는데 그 위에 학교를 지었다는 둥 여러 가지 말들을 만들어내곤 했었다.

내내 맑던 날이 꼭 답사 때만 되면 비가 내리니 어릴 적 그 상상력이 또 발동이 걸린다.

뱀이 무서워 전주 인근의 산에 갈 때마다 창암 이삼만 선생의 이름을 손등에 부적이라고 쓰고 다녔던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창암 이삼만 선생님께서 효자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부친께서 뱀에 물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삼만 선생이 뱀이란 뱀은 눈에 보이는 대로 찾아 죽여서 뱀들이 이삼만 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도망친다고 하여 몸에 그 이름을 지니고 다니면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유난히 뱀이 눈에 ! 띄는 나에게도 그 이름의 효력인지 한동안은 뱀이 보이지 않았었다.

혹시 그 부적이라고 믿었던 이삼만 선생의 이름을 남용한데 대한 벌은 아니었을까? 부적의 효과라기보다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마음의 경계심이 풀어져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잠시 축축한 기분을 전환시켜 보았다.

 
▲ 신흥고
신흥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듯 쉬는 시간인지 시끌벅쩍한 소리가 학교 전체를 들썩거리게 하는 것 같다.

신흥학교는 1900년도에 설립된 한강 이남지역 최초의 근대교육 시설이었다고 한다.

1937년에는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학교를 자진 폐교하는 아픈 역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듯 교문안으로 들어서니 3.1운동 기념비가 떡하니 서 있다.

▲ 3·1운동 기념비
또한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지역의 기독교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학교이다.

1936년 리차드슨 여사의 기증을 받아 건립된 강당 겸 체육관 건물과 1982년 화재로 소실되고 남은 본관건물의 현관포치가 근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비가 내려 촉촉이 젖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활기찬 아이들의 걸음걸이! 가 새삼 저물어 가는 이 계절과 참으로 대조적이면서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신흥고를 나와 선충사로 가는 길은 도로가 생겨 산자락이 끊겨져 있다.

산으로 이어졌을 곳을 사람의 편리를 위해 잘라 놓고 보니 실제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데는 또 다른 불편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로를 만들고 차를 만들어 인간이 조금 편하려고 하였지만 결론적으로 현대를 살면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 중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이 교통사고라는 것을 보면 꼭 문명의 발달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든 생활의 편리보다는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먼저여야 되지 않을까. 선충사를 나와 한참을 도로를 따라 가다 숲길로 접어든다.

바로 입구에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철책을 만들려고 하는지 공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석 위로 소나무가 비스듬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무리봐도 소나무를 보호하면서 철책을 어떻게 만들것인지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런 일이야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아서 하겠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오솔길에 쌓인 낙엽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소리가 정겹다.

답사동안 비를 맞고 다녀야 한다는 불편한 생각이 싹 가셔지게 만들만큼 빗소리와 숲의 향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빗속에도 숲길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보다 한수 위다.

자연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마음은 나이가 들수록 더 커지는 것 같다.

산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얼굴을 보면 나무와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꾸 그리워하고 동경하다보면 그것과 닮아 지는 것은 아닐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리라. 오늘도 난 자연과 닮은 삶을 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어 본다.

/글 사진=김한하<시인>   <톡톡 사진속 정보>

▲희연당사적비,중수비-중화산동 신흥학교 교정  이 비는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세운 것으로 조선 숙종26년(1700) 관찰사 김시걸이 진사 오명기와 이곳 황학대 기슭의 옛 사마제 (司馬齊-생원과 진사가 모이는 곳)자리에 학당을 창건하고 희현당(希顯堂)이라 하였다.

희(希)란 장차 “현인을 바라고 성인을 바란다.

”는 뜻 이고, 현(顯)이란 “입신양명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자”는 뜻이다.

희현당 에서는 봄, 가을로 나누어 30명을 뽑아 관비로 가르쳤다  사적비(1707건립)의 글은 봉렬대부 전 군수 유백승이 짓고 글씨는 박초재가 쓰고, 왼쪽 중수비(1743년건립)는 통덕랑 유일성이 글을 쓰고 글씨는 박해가 쓰고 전서는 정후가 썼다.

 신흥학교의 역사는 희현당을 시작으로 310년의 배움터라고 볼 수 있다.

▲신흥학교 강당 및 본관 포치 -근대문화 유산 20호  신흥학교는 선교사에 세워진 기독교 학교로 개교 초기에 세워진 강당 건물과 본관 은 신교사 신축시 허물어 버리고 현관에 해당하는 포치(porch)만이 담장이 넝쿨로 뒤덮힌채 덩그러니 남아있는데 이 두 구조물이 193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근대문화 유산 20호로 지정 보존되고있다.

▲ 선충사
▲선충사-중화산동 122 선조31년(1598)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장군의 순국의 듯을 기리기 위해세운 사당이다.

이영남의 자는 자호요 호는 호악으로 선조4년(1571)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으며, 18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란때 경상우수사 원균의 막하에서 소미포 권관이 되었다.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가 되자 옥포해전 및 거제도 해전에서 선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여 그 공로로 가선대부가 되었고 정유재란 노량해전에서 선전 하던 중 28세의 나이로 전사하여 남해의 수호신이 되었다.

선조38년 선무원종1등공신이 되었고 순조 때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에 추증되었다.

▲화산서원비-전북문화재자료 제4호 완산구 중화산동   이 비석은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화산서원에  있던 비이다.

전북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던 이 서원은 조선 선조 11년(1578)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전주부윤으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에 힘썼던 조선전기의 대학자 이언적(李彦迪)과 전라감사로서 청렴한 정치를 펼친 송인수(宋麟壽)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효종9년에 나라에서 이름을 지어주고 후원하는 사액서원으로 선정되었으나 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68)에 따라 헐렸다.

이후 향교가 들어섰다가 교동으로  향교를 옮겼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우고 용모양의 머릿돌을 올려둔 모습이다.

납작하게 표현된 거북은 독특하게도 옆을 향하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거니는 용의 무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비문은 당대 서예계의 양송이라 불리는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현종5년(1664) 3월에 세운 비석만 남아 이곳이 예전에 선비들이 글을 읽던 학문의 전당 이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 유연대
▲유연대(油然臺)  유연대는 고지도에 표기되어 있으나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청수코데기, 감나무골 ,진북사, 어은골, 서살미, 도토리골로 이어지는 산자락의 모습이 이곳 유연대에 이르러 전주 부중에서 보았을 때 마치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하늘로 피어 오르는듯하여 구름 같은 것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모양을 뜻하는(油然)  평평한 곳(臺) 이라는 의미로 옛 선인들이 붙인 낭만적인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신흥학교와 도토리골 능선이 마주치는 봉우리 평평한 곳을 가리키며 예전에 도토리 골엔 오늘 날로 치면 제지공장인 지소(紙所)가 있었으며 신흥학교자리엔 요즈음의 관립기숙학교인 희현당과 한때 향교가 있기도 했고, 산기슭엔 삼사(三祀)의 하나인 사직단이 그 아래쪽에 자리 하기도한 유서 깊은 곳이다.

▲진북사  진북사(鎭北寺)는 전주시 진북동 호암산(虎巖山:화산공원))에 있는 사찰로 신라 말 도선(道詵 827∼898)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북고사(北固寺)라고 하였다.

북고사(北固寺)는 유연대(油然臺) 북쪽의 서쪽 끝 어은동(魚隱洞)에 있어 속칭 부엉이바위 절로서 이 일원을 호랑이 아가리 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내에는 숲정이 바람 속에 다소곳이 서 있는 미륵불의품속에서 고요가 흐른다.

  1856년(조선 철종 7) 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주성 북쪽을 보강하기 위하여 이 절에 나무를 심고 절 이름을 진북사로 바꾸었다고한다.

극락전과 미륵전·산신각·요사 등이 남아 있고, 유물로 창건 당시의 것으로 전해지는 석조미륵불상이 남아 있다.

이중 미륵불상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1930년대에 절 인근에 사는 한 노파의 꿈에 미륵이 나타나 '나는 전주천변에 처박혀 있어 매우 괴로우니 편안하게 옮겨주면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노파가 나룻배를 타고 이 절 아래의 전주천변 늪으로 가서 이 불상을 찾아냈다.

몇 년 후 이 절의 신도들이 미륵전을 짓고 미륵불을 남향으로 세웠는데, 이번에는 미륵불이 일꾼들의 꿈에 나타나 동향으로 옮겨달라고 하였다.

그 일꾼이 무거워서 옮기기 어렵다고 하자, 손만 대면 움직일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날 주지와 일꾼이 미륵불을 모신 불단에 손을 대자 저절로 동향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재 적상산 안국사에 있는 옛 그림에 의하면 진북사 주변은 복사꽃으로 뒤 덮혀 있고 20여 채의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건물들은 20여년 전 절 뒤쪽에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 훼손되어 다시 지은 것이다.

▲아그배나무  장미과 속하는 낙엽활엽소교목으로 산지와 냇가에서 자란다.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환경회의에서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나무라는 결론을 짓고 각 나라마다 '생명의 나무'를 지정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그배나무가 지정되었다.

 아그배나무는 사과나무에 가까우나 열매가 달린 모양새가 우리가 흔히 먹는 배나무의 모체가 되는 돌배나무와 비슷하며 적은 돌배를 닮아서 열매가 작아 아기 배라 불리다가 아그배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설익은 열매를 따 먹은 아이들이 "아이구, 배야!" 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꽃 사과', '애기사과' 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열매의 모양새가 사과를 축소해 놓은 듯 하기 때문이다.

▲ 구절초
▲감태나무녹나무과의 활엽 관목으로 간자목. 뇌성목, 백동백나무라고도 하며 잎의 떨켜가 발달하지 않아 단풍이 든 다음에 잎을 떨구는 대부분의 활엽수들과는 달리 한겨울에도 마른  갈색 잎을 그대로 달고 있다가 새잎이 나오면서 떨어지므로 겨울 산에 유난히 눈에 잘 띄는 나무이다.

햇빛을 좋아하는 나무로 예전 민둥산이 많을 때에는 흔하게 번성했으나 근래에 숲이 우거지게 되면서 점차로 세력이 줄어들고 있다.

껍질이 잿빛 밤색이며, 잎은 두껍고 어긋난다.

4~5월에 노란 꽃이 피고 열매는 가을에 검게 익는데 약간 매운 맛이다.

한국 원산으로  중부 이남에 자라며 특히 지리산 줄기를 따라 남부 지방에 많이 자생하며, 산기슭의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고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한다.

잎의 질감이 곱고 색감이 아름다워 가로수나 조경수로 심을 만하며 재질이 연하면서도 질겨 소쿠리손잡이나 지팡이재료가 되기도 했다.

/류종권<전주문화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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