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니?”길을 가다가 문득 내면에게 묻습니다. 이는 나를 간섭하는 내면의 ‘너’에게 묻는 말입니다. 이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또 다른 내면의 낮선 얼굴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이 문득 모든 것이 부질없어지기도 자꾸 자꾸 뒤 돌아 서고 싶어 질 때도, 뒤 돌아가고 싶을 때도,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싶은 욕구 같은 것들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간혹 모든 사람들을 피해 산속으로 꽁꽁 들어 가버리고 싶거나, 집단적인 장소에 있으면 느끼는 폐쇄공포의 답답함, 모든 것이 무의미한 허구성, 그러한 인식의 욕구들입니다. 가끔 모든 것이 시시해져서 견딜 수 없는 것이거나, 염소의 말뚝처럼 행동하는 ‘나’를 잡아당기며 간섭하는 내 안의 ‘너’는 도대체 누구냐는 거지요.

  그러니까 분류하자면 염세주의자이거나 허무주의자의 종족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늘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 하게도 오히려 그러한 욕구들이 더욱 강열한 새로운 욕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거나 길을 가다가 문득 내면의 또 다른 낮선 이에게 “너는 누구니” 라고 는 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고 있는 ‘나’를 자꾸 회피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내 안의 목소리 ‘너’는 누구냐는 거지요.

  정신의학자인 라캉은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거울 이론’을 도입합니다. ‘거울단계’는 라캉이 텍스트에 자주 인용하는 용어인데 라캉은 우리가 실재한다고 알고 있는 나(자아)는 실제로는 ‘상상의 구조물’이라는 말을 합니다. 라캉의 상상계는 프로이트가 사용한 나르시시즘의 정교화인데 그러니까 라캉은 프로이트의 인간의 자아는 상상적 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쨌거나 거울속의 이미지는 자아의 개념에 필수적이고 상상체가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하는 활동, 자기의식을 통해 주체가 된다는 것으로 자기의식속의 정신은 일체의 타자적 관계로부터 자기에게 돌아와 자기가 자기를 정립하고 형성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라캉의 관심은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무의식에 있습니다. 다만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그 무의식을 생물학적으로 보지 않고 언어와 관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내부의 메커니즘으로 무의식의 발현입니다. 이렇게 언어의 작용으로 무의식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무의식을 품고 반대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인 의식이 ‘낮’이라고 하면 무의식은 타자로 ‘밤’이라고 한다는데 이것은 정신분석에서 ‘마주 봄’이라는 것입니다. ‘마주 봄’과 같은 원리로 순환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한 과정도 다른 관정 없이 성립되지 않는 계절의 순환 같은 것입니다. 다른 과정 없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실재계는 저항하는 요소로 남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실재계는 매우 역설적인 개념입니다. 이런 실재계는 인간존재의 궁극적 한계로서 죽음의 충동이나 주이상스와 연계된다는 것입니다. 실재계를 이해하는 어려움은 그것이 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이지만 나의 관념적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는 더 열심히 살고 싶은 욕구, 숨겨져 있는 카오스 세계가 아니가 생각해 봅니다. 라캉에 따르면 욕구의 체계가 내는 다른 목소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해체의 리비도를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렇게 실재의 확인을 주이상스를 통해 갖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내면에서 들리는 ‘너는 누구냐’는 욕구의 또 다른 목소리로 동일화에 따른 갈등이나 상실이군요,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실재세계를 ‘거울 이론’으로 다시 해보는 자기 점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라캉은 거울단계를 인간의 자의식, 공격성, 경쟁, 자기애, 질투의 현상으로 설명하며 “프로이트로 돌아가라” 로 자신의 모토를 내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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