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남고산성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으나, 군데군데 성벽의 위용이 남아 있다.

전주시 남방의 고덕산 서북계곡을 에워싼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조선시대에 남고진을 두었던 곳이다.

후백제왕 견훤이 쌓았던 것이라 하며, 전주의 남동방향으로 남원·순창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충을 좌우로 지키고, 북으로 전주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1380년 9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조상의 고향인 전주의 오목대에서 종친들과 연회를 베풀다가 흥이 무르익자 대풍가를 불러 장차 고려를 뒤엎고 새나라를 세울 뜻을 비치니 종사관이었던 정몽주가 만경대에 올라 비분한 심정을 한편의 시로 남긴 우국시가 남쪽 암벽에 새겨져 있다.

성벽은 험준한 암벽과 천경대·만경대·억경대로 불리우는 봉우리를 감돌고, 서북쪽의 서문·서소문쪽이 계곡방향이어서 성내에 반곡천이 흘러내린다.

문터는 동·남·북방의 안부에도 있으며, 여기저기에 역사의 현장으로서 남겨진 유적이 많다.

성내의 서문터 옆에 서있는 남고진사적비에 의하면 임진·정유의 왜란때 전주읍성과 더불어 의각의 세를 이루는 천험으로 전주방어의 요충으로 이용됐다고 전하고 있다.

1811년에 이상황의 획책으로 수축공사가 시작돼, 이듬해 박윤수의 감독으로 완축됐다.

남고진사례에 의하면, 성안에는 방 4칸과 대청 8칸으로 된 진장의 아사를 비롯해 각종의 군기·화약창고가 즐비했음을 알 수 있다.

남·북의 장대와 문루, 포루가 있는 외에도 성안에 제언 4곳과 우물 25처가 있고 민가 113호가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은 동으로 40리 거리에 만막관이라는 또 다른 시설을 함께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치모양의 문에 문루가 갖춰지고, 좌우의 관성은 길이 150보이고 여장은 78좌가 있어 수문장과 병졸이 배치돼 있었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으나, 군데군데 성벽의 위용이 남아 있다.

대소의 할석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문과 그 부근은 비교적 잘 다듬은 무사석이 사용됐다.

조선시대 이전의 성벽으로 추측되는 대부분의 체성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외침 때마다 전주지역 주민들의 피난처로, 특히 고려말 왜구의 침략 때에도 이곳에 농성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종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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