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정여립의 꿈을 접게 만든 인물을 다시 꼼꼼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정여립의 꿈을 접게 만든 인물을 다시 꼼꼼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전면에는 송강 정철이, 막후에는 구봉 송익필이 있습니다. 송강 정철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정철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많은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사미인곡 등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문학사적으로는 귀중한 대접을 받을 분이지만 정치사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면이 많습니다. 문학과 정치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당시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요.”

-정철이 정여립에겐 어떤 대우를 했읍니까.

“정철은 율곡 이이와 동갑이면서 함께 수학, 학문적으로도
한 맥을 이룰 정도로 대단했었죠. 그의 제자를 보면 그의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릴적 정치적인 굴곡을 몸으로 겪으면서 마음 한켠에는
응어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엿보다가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을 홀대했던 여러 사람을 역모와 관련 지어 철저하게 제거했죠.
그런 점을 봐서 대단히 무서운 사람였습니다.”

-정치적인 굴곡이라면....

“정철이 10세때 아버지 정유침이 을사사화 당시 대윤
일파로 몰려 유배되면서 1551년 전남 광주근교 담양 할아버지 묘소 산지기 집으로 내려와 살았죠. 과거에 급제하기 전 18세때 여덟살 아래인 동암
이 발(1544~1589)이 있는 집으로 놀러 갔었죠. 이때 정철보다 여덟살 아래인 이 발과 동생 이 길이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정철이 무심결에  훈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발 형제가 달려들어 ‘역적
놈의 자식이 시키지도 않은 훈수를 한다’며 턱에 난 수염을 뽑아버렸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심한
모욕감을 느낀 정철이 이발 형제에 대한 원한을 응어리로 키웠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럼 이 발도 정철이 정치적으로 성장한 한 후 어려움을
겪게 되었겠군요.

“그럼요. 역모 사건을 기획했던 정철은 역모사건이 수면위로
부각되자 ‘기회를 잡았다’며 동인으로 서인과 맞섰던 나와 이 발을 철저하게 제거하기로 했죠. 정철은 역모사건을 기화로 이 발 형제는 물론 팔순이었던 이 발의 어머니와 여덟살 되었던 아들까지 때려 죽이고 말았죠. 정철은
그처럼 표독하고 위험한 인물였습니다.”

-정말 안타깝군요. 문학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였던 정철이 정치적으로는 전혀 다른
얼굴을 후손에게 보이니 말이죠.

“개인의 원한을 국가 대사에 접목시켜 한풀이를 했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정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르게 나타난 것이겠지요.”

-그럼 막후에서 역모사건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송익필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어떠했습니까.

“송익필의 자는 운장, 호는 구봉이었다고 전에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토정비결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은 중봉 조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대 스승으로는 성혼 이이와 함께 송익필이라고 했습니다.
전에도 했던 것처럼 조헌은 송익필을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고 극찬을 했죠.그가
남긴 ‘구봉집’은 내용도 충실해 후일 우암 송시열과 고종이 ‘익필은 도학과 덕행이
모두 훌륭하다’고 평을 했습니다.”

-그렇게 후세에서 높게 평가를 받았던 송익필이 어떻게 전라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진안 부귀면에 운장산이란 유명한 산이 있습니다. 해발
1천1백미터가 넘으니 모악산 보다도 높은 산이라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명산입니다. 그런데 그 산의 이름이 송익필의 자를 따 지어졌어요. 원래
주줄산였는데 운장산으로 불러지게 된 거죠. 송익필이 운장산 밑에서 글을 읽었다고 해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답니다. 또한 운장산에서 용담면쪽으로 가다보면
구봉산이 나옵니다. 송익필의 호를 따서 붙여진 것, 운장산과 같습니다.”

-뜻 밖이군요. 전라도 출신 정여립을 제거하는데 앞장 섰던 인물의 호와 자를 전라도
산에다 붙였다니.

“1천미터가 넘는 산중에서 역사인물의 이름이나 호나 자를
따서 붙인 곳이 없습니다. 고운 최치원선생도 지리산에서 골(고운동) 하나 얻었고 임경업장군도 속리산에서 대(경업대) 하나 얻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송익필의 자와 호를 딴 산이 진안에 두곳이나 있다니 나도 놀랐습니다.”

-정여립을 제거하고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했던 송익필은 기축옥사후에 어떻게 됩니까.
정치적으로 승승장구 하나요.

“선조의 친국에도 불구하고 최영경을 나의 최 측근인 길삼봉이라고 입증하는데 실패해서
정철과 서인은 선조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동생 한필과 함께 유배지에 오르게 되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사면을 받고 유배지에서 풀려나지만 이집 저집을 전전하다가 임진란이 끝나는 해에 처량한 모습으로 이승과 하직하고 말았죠.”

-그런 것을 보면 역사는 공정하다고 볼 수 있군요. 남을 아프게 하면 그 댓가를
받게 하는 것. 그것이 역사라고 볼 수 있는데요.  기축옥사에 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전라도가 역적이 많이 나오는 역향이라는 대목인데요.

“그거 모두 자기 합리화 하기위해 지어낸 이야기인데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산과 물이 자연스럽게 생겨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인간이 여기에다 쓸데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입맛에 맞도록 해석해서 인간사를 다스리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것이지요.”

-사실 전라도가 역향이어서 정여립같은 역모자가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해서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죠.

“역향이라고 규정지은 것은 물길을 보고서 말 많은 사람이 지어낸 거예요. 호남에 대한 편견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시발 된 것 아닙니까. 제8훈에서 차령과 금강 이남은 지리적으로 배역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 그 지방 사람들의 인성 또한 그러하니 조정에 참여케 하거나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런 말이 나온 뒤로
전라도는 이상하게 배역향이란 묘한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어 이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뜻도 모른채 손해를 보고 있었잖습니까.”

-말도 안되는 풍수설때문에 수백년 동안 피해를 보고 있다고 봐야겠죠. 배역수라느니
배역의 형세라는 등으로 이곳 사람들을 옭매고 숨을 틀어 막았습니다.

“성호 이익의 지적대로 호남의 물길이 산지산방으로 흩어지는 형세(산발사하·散髮四下)인 것은 확실하죠. 이것을 배역의 형세를 취한 것이라고 풀이한 것이죠.”

-한국 풍수를 지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풀이한 대로 당시에도 그렇게 호남지세를
풀이했는지요.

“어떻게 풀이했는지요.”

-최 전교수는 호남은 민심이 흩어지고 영남은 인심이 뭉쳐 충신이 배출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어찌 사람 마음이 풍수에
따라 결정된 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배역에 땅에 사는 사람 모두를 한양주변으로 이주시켜 한 사람도 살지 않도록 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내가 살던
당시 도참설이 유행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을 수 만 없잖습니까.”

-왜 자연이 스스로 알아서 생긴 것을 인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자기입맛대로 해석하느냐가
더 문제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호남의 물길 즉 금강은 북쪽으로, 동진
만경강은 서쪽으로, 영산강은 남서쪽으로 섬진강은 남쪽으로 흐릅니다. 더욱이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발원지가 남원 운봉인데 동쪽으로 흐릅니다. 반면
낙동강은 하나가 되어 다대포 앞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전라도는 흩어지고 영남은 모인다는 말이 나왔겠지요.”

-사실 고려때엔 3대 배역강으로 영산강 섬진강과 낙동강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와서는 낙동강이 충신배출의 산실로 뒤바뀌잖아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왜 그리 풍수에 연연해서 인재등용의 척도로 이용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역배향의 땅에서 태어나
용상에 올랐잖습니까. 조선의 사상으로는 도저히 일어 날 수 없는 일입니다. 배역의 땅 자손이 용좌에 오른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하여튼  정여립 사건으로 전라도가 배역의 땅이란 오명을 다시 뒤집어 쓰게 되었고 그 불행이 수세기동안 이땅을 지배해왔다는
데에 한이 서려 있습니다. 과연 반역의 땅이 있다고 봅니까.

“반역이란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왕조의
무능과 부패가 극에 달하면 국민적인 저항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죠. 그것을 정도에 어긋난다고 반역이라고 하는 것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 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저항이잖아요. 무능한 왕조로 인해 국민이 고통을 받는다면 당연히 주인이 바뀌는 것이 순리지요. 세계사 어딜
보아도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가 오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국민은 바른 왕조를 갈망해왔습니다.”

-반역이란 말은 지배계층에서 바라 본 단어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겠습니다. 그 말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중국 역대 왕조를 보면 왕의 씨앗이 새 왕조를 건국하는 일이 적습니다. 누구나 왕이 될 수 있고 종묘를 세울 수 있습니다. 농사꾼도 왕이 되고 스님도 왕이 됩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조선만 왕의
씨앗만이 왕이 되야 한다고 하니 불합리한 것 아닙니까. 그걸 바꾸려다 난 반역자가 되었고 내가 태어난 전라도는 배역의 땅으로 다시 전락해 후손들이
불이익을 당했다니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정여립이 죽은 직후 조선은 왜란으로 인해 황폐화됩니다. 그중에서 유독 전라도만이
화를 덜 입었죠. 이순신장군도 전라도가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할 정도 였습니다. 전라도는 천혜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반역의 땅으로 전락해 숱한 어려움을
겪게 될까 궁금한 대목입니다.

“그것은 다 기득권층의 편견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고. 이제 편협된 시각에서 바라보는 풍수설을 털어버리고 전라도의 긍적적인 면을 잘 살려야지요. 과거에
얽매이면 발전을 꾀할 수 없을 것 입니다. 나로 인한 피해는 더 이상 입어서는 안되겠지요. 관례처럼 내려왔던 우리사회의 모순을 교정하지 않으면
또 다시 피해가 되풀이 될 것이 아닙니까. 또 다른 피해를 후손들이 입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기축옥사 피해자에 대해 긍정적사고로 접근해야 할 줄
압니다.”          

-그러하도록 역사를 공부하는 사가들과 정치인들이 앞장서야 겠지요. 지역감정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도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요.

“그래야지요. 나는 시대의 흐름에 희생양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아픔이 이땅에서 사라져야겠지요.민중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야지 국민이 싫어하는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시대가 다시 와서는 안되지요.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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